溫谷의 따뜻한 생명 읽기

肺 폐로 가는 길 · 제3편

第1程. 안과 밖의 경계

숨이 막히던 시절

溫谷 · · 9분

바람 끝이 제법 서늘한 늦은 아침이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마른 흙길로 천천히 접어들었다. 늘 걷던 익숙하고 호젓한 산책로였지만, 오늘 내딛는 발걸음의 무게는 사뭇 달랐다. 내 몸 깊은 곳, 나 자신의 본질을 찾아 내면으로 떠나는 기나긴 여정의 첫 발을 떼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폐(肺)의 마을로 가는 길을 대체 어디에서부터 열어야 할까.’

먼저 현대 생리학의 설명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코와 기도를 타고 들어간 공기는 기관지를 지나 수억 개의 폐포(허파꽈리)에 닿는다. 그곳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얇은 막—불과 1마이크로미터도 되지 않는 간극을 사이에 두고, 공기와 혈액 사이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정교한 맞교환이 일어난다. 단 몇 분만 멈추어도 생명의 불씨가 꺼져 버리는 이 정밀한 구조 속에서, 폐는 더없이 완벽하고 거대한 ‘가스 교환 기관’로 묘사된다.

반면 고전의학은 폐를 조금 다른 결로 그려냈다. 『황제내경(黃帝內經)』은 폐를 일러 오장육부를 보좌하며 몸 전체의 질서를 다스리는 ‘상부지관(相傅之官)’, 즉 나라의 재상(宰相)에 비유했다. 기(氣)의 흐름을 주관하고, 위와 바깥으로 뿜어내는 선발(宣發)과 아래와 안으로 가라앉히는 숙강(肅降)을 통해 몸 안팎의 통로를 빈틈없이 조율하는 존재. 오랫동안 머릿속에 간직해 온 폐의 이미지는 냉철한 시선으로 국가의 질서를 살피는 노련한 정치가에 가까웠다.

한쪽에는 정밀한 가스 교환 기관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몸 전체의 조화를 지휘하는 재상이 있었다.

둘 다 매력적인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첫 발걸음을 떼기 위한 디딤돌로는 어딘가 너무 매끄럽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폐의 해부학적 구조나 교과서적 정의를 읊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왜 이 장기가 살아 숨 쉬는 우리에게 그토록 절박하고 원초적인지, 그 서늘한 실감이 처음 내 몸을 파고들었던 자리에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콜록, 쿨럭—

산책로 저편의 벤치에서 거칠고 찢어지는 듯한 기침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남성이 상체를 깊게 웅크린 채 가슴을 쥐어짜듯 연신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곁을 지나치려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슬그머니 걸음을 멈추고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기침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헐떡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소리가 공기를 가르는 찰나, 나 역시 무의식 중에 숨을 턱 멈추고 말았다.

어깨가 굳고, 가슴팍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문득 그 반응이 낮설게 다가왔다. 이미 다 지나간 시절이라 여겼건만, 내 몸은 여전히 그 공포의 감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기침 소리에 반사적으로 호흡을 멈추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안전거리를 재며,
무심코 들이마시던 공기마저 의심하고 경계하던 시절.

코로나였다.

그저 평범하게 숨 쉬는 일조차 공포가 되었던 그 시절.

당시 병원 응급실의 풍경은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헐떡이는 환자들의 얼굴마다 산소마스크가 씌워졌고, 손끝에는 산소포화도 측정기가 위태로운 숫자를 깜빡였다. 날카로운 기계음이 빗발치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한 모금의 숨을 더 들이켜려 처절하게 허우적거렸다.

의료진은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방호복과 겹겹의 마스크, 얼굴을 짓누르는 고글과 안면 보호대를 뒤집어쓴 채 사투를 벌였다. 보호대 안쪽에는 하얗게 습기가 차올랐고, 흉부 압박과 기관내삽관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근무 교대 시간이 되어서야 복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간호사가 방호복을 벗고 마스크를 걷어냈다. 콧대와 양쪽 뺨에는 마스크에 짓눌려 피가 맺힌 듯 붉고 선명한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타인의 호흡을 지켜내기 위해, 정작 의료진은 방호복이라는 차단막 안에서 질식할 듯 가쁜 숨을 삼키며 자신의 호흡을 희생해야 했던 것이다.

감염을 막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은 철저한 ‘단절’이었다. 국경이 닫혔고, 교실과 일터가 멈추었으며, 다정한 악수도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온기도 모두 금지되었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인류가 쌓아 올린 거대한 문명의 톱니바퀴가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인류가 아무리 눈부신 문명을 세웠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지극히 연약하고 원초적인 생물학적 조건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숨을 쉬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며, 단 1분이라도 숨을 이어가려면, 좋든 싫든 바깥 세계의 공기를 내 몸 가장 깊숙한 곳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서늘한 진실을 말이다.

결국 나 역시 그 거대한 감염의 파도를 비껴가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목구멍 안쪽에서 까끌까끌한 통증이 번지고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오한이 기어오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조금 엉뚱하게도 학구적인 호기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당시 나는 한의학 고전의 정수로 꼽히는 『상한론(傷寒論)』에 깊이 빠져 있었다. 후한 말기의 명의 장중경(張仲景)이 저술한 이 책은, 외감성 열병이 진행됨에 따라 인체가 보이는 전신 반응을 태양(太陽)·양명(陽明)·소양(少陽)·태음(太陰)·소음(少陰)·궐음(厥陰)이라는 ‘육경(六經)’의 틀로 정밀하게 추적한 걸작이다. 오한과 발열, 땀과 갈증, 소화 상태와 체력의 쇠락을 살피며 병의 위치와 흐름에 따라 맞춤형 처방을 제시한다. 병을 단순히 고정된 병명 하나로 가두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몸 전체의 반응 양상’을 동적으로 포착해 낸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육경을 지나치게 도식적인 진행표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병이 태양에서 시작되어 양명과 소양을 거쳐 태음·소음·궐음으로 차례차례 깊어지는 여섯 칸짜리 계단인 줄 알았던 것이다.

체온계의 숫자가 가파르게 치솟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은밀한 기대를 품었다.

‘드디어 내 몸을 실험실 삼아 책 속의 육경(六經)을 생생하게 관찰해 볼 기회가 왔다!’

그러나 실제로 내 몸에서 벌어진 일은 얌전한 교과서적 진행 따위가 아니었다. 열은 순식간에 펄펄 끓어올라 나의 오만한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머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았고, 침을 한 모금 삼킬 때마다 면도날로 목구멍을 난도질하는 듯한 기이한 통증이 밀려왔다. 두꺼운 이불을 두 겹이나 덮어도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들이닥치더니, 불과 몇 분 뒤에는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식은땀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가슴 한복판에서 차가운 칼바람과 뜨거운 불길이 동시에 소용돌이쳤다.

‘아, 사람이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몸의 변화를 차분히 기록하겠다던 당찬 다짐은 땀에 젖은 이불 속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압도적인 고열과 통증 앞에서는 누구나 한없이 나약하고 비참한 생물학적 존재로 전락할 뿐이었다. 뼈마디가 쑤시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면 그 어떤 고상한 이론도 끼어들 틈이 없다. 모든 우아한 의학 이론은 이 처절하고 날것의 고통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사치였다.

열병의 고비를 넘기고 한참 뒤에야 『상한론』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부끄럽게 깨달았다. 실제 병의 전변(傳變), 즉 병이 시간에 따라 옮겨가고 변하는 양상은 단계를 훌쩍 건너뛰기도 하고, 서로 다른 상태가 복합적으로 뒤섞이며 전혀 다른 길로 치닫기도 한다. 책이 단순했던 것이 아니라, 내 시야가 글자 뒤에 숨은 생명의 역동을 읽어내지 못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 지독했던 고통의 한복판에서, 또 하나의 근원적인 사실을 온몸으로 절감했다.

평소에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숨’이라는 행위가, 실은 바깥 세계를 내 몸의 가장 깊숙한 안방까지 무방비로 초대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그때부터 폐라는 장기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추었던 자리에서 다시 발을 뗐다. 멀리서 들려오던 기침 소리도 어느덧 바람결에 흩어졌다. 호젓한 길을 걷다 보니, 코로나와 열병의 기억은 조금 더 넓은 사유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세포 안으로 들어가야만 증식할 수 있다. 내 몸 바깥에 떠돌던 미지의 존재가 경계를 뚫고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 일. 결국 감염이란 ‘나’와 ‘외부 세계’가 맞부딪히는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러나 인간은 바깥 세계와의 문을 꽁꽁 닫아건 채로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기를 들이마셔야 하고, 물을 마시고 음식을 삼켜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밖의 것을 안으로 들이는 일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지만, 그 수용 없이는 생명이라는 기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위험을 막아내려면 문을 굳게 닫아야 한다.
하지만 살아 숨 쉬려면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생명은 안과 밖이 맞부딪히는 위태로운 경계 위에서, 열림과 닫힘이라는 지독한 모순을 견뎌내며 이어지는 줄타기였다.

그 순간, 폐는 더 이상 해부학 책에 나오는 단순한 가스 교환 기관으로 보이지 않았다. 폐는 바깥의 거대한 세계가 내 몸이라는 작은 우주의 가장 깊숙한 내실까지 파고드는 ‘거대한 접경지’였다.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차가운 바깥 공기가 차올랐다. 방금 전까지 철저히 ‘내가 아니었던’ 바깥의 조각이 내 몸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잠시 머물더니, 이내 나의 온기와 습기를 품고 다시 세상 밖으로 빠져나갔다.

호흡의 결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니, 숨이란 참으로 기이한 역설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매 순간 바깥 세계를 내 안으로 기꺼이 초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외부의 흐름에 나를 송두리째 내맡기거나 세상과 무분별하게 뒤섞여 버려서는 안 된다. 세계를 들이마시면서도 나는 여전히 ‘나’라는 고유한 형태와 경계를 꼿꼿하게 지켜내야 한다.

경계(境界)는 외부를 차단하기 위해 높게 쌓아 올린 닫힌 성벽이 아니라, 나와 다른 세계가 만나 끊임없이 조율하고 대화하는 가장 내밀한 접점이었다.

그 경계의 양 극단에는 생과 사를 가르는 두 개의 결정적인 장면이 놓여 있었다.

한쪽 끝에는 ‘생의 첫 순간’이 있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탯줄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던 아기가 마침내 차가운 세상 밖으로 밀려 나온다. 그전까지 폐 속 액체로 가득 차 있던 작고 축축한 폐에 난생처음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이닥치고, 여린 가슴팍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첫 울음소리. 어머니의 숨결에 기대어 살던 방식이 끝나고, 스스로의 호흡으로 바깥 세상을 받아들이며 맺는 최초의 독립 선언이다.

그리고 그 맞은편 끝에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 놓여 있다.
임종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침묵이 있다. 거칠게 이어지던 숨소리가 점차 얕아지고, 한 번의 들숨과 다음 날숨 사이의 침묵이 끝없이 길어진다. 마침내 길고 무거운 마지막 숨 하나가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려도, 다음 숨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이 ‘숨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첫 숨을 내쉬며 세계와 관계를 시작하고, 생을 마감하며 마지막 숨을 거둔다. 한 인간의 찬란하고도 고단했던 전 생애가, 결국 그 첫 호흡과 마지막 호흡이라는 두 경계선 사이에 오롯이 담겨 있는 셈이다.

터덜터덜 걷던 걸음이 다시 느려졌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만 해도 폐의 마을로 향하는 첫걸음을 어디서 뗄까 고민했을 뿐인데, 산책로의 기침 소리에서 시작된 사유는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 있었다. 코로나의 공포, 상한론의 열병, 안과 밖을 가르는 위태로운 경계, 그리고 생의 첫 숨과 마지막 숨까지.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가슴 한구석에서 조용한 물음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 얇고 부서지기 쉬운 경계는 대체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바다라는 아늑한 품에 안겨 살던 원초적인 생명은,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이 건조하고 위태로운 대기 속으로 첫 숨을 내뱉게 되었을까.

그 아득한 진화의 시간 속에서, 생명은 바깥 세계와 부딪치며 어떻게 스스로 허파를 빚어낸 것일까.

머릿속을 맴돌던 거대한 물음들을 품은 채, 발밑의 단단한 흙을 힘주어 디뎠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가 긴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다음 여정으로 그 아득한 시작의 바닷가로 한 걸음 더 걸어가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