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谷의 따뜻한 생명 읽기 · 오장순례
肺 폐로 가는 길 · 제10편
第7程. 빈자리의 몸
슬픔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溫谷 · · 13분
자동문 너머로 발을 들이자, 바깥의 어둠과 단절된 낯선 세계가 펼쳐졌다.
밤을 억지로 지워내고 낮으로 돌려놓은 듯 지나치게 밝은 형광등 불빛. 길게 뻗은 복도 벽면 모니터에는 호실 번호와 고인의 이름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떠 있었다.
알싸한 소독약 냄새와 국화 향, 향로의 매캐한 연기, 그리고 접객실에서 끓여내는 기름진 육개장 냄새가 뒤섞여 공기 중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는 누군가 조문 온 지인을 맞이하며 겨우 엷은 미소를 띠다 황급히 표정을 굳혔고, 다른 빈소 안쪽에서는 억눌린 울음소리가 낮게 새어 나왔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일상의 사소하고 익숙한 잡음들과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무게가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묘하게 맞닿아 있었다.
검은 옷깃을 여미며 복도를 걸었다. 고인과의 기억을 되짚어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런데 발걸음은 저절로 조심스러워졌고, 목소리는 목구멍 안쪽으로 가라앉았다. 어깨와 가슴이 누군가 안쪽에서 잡아당기듯 움츠러들었다.
마음이 슬픔이라는 것을 채 깨닫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온 감각으로 알아채고 있었다.
국화꽃으로 둘러싸인 제단 위에 고인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 얼굴은 생전 마주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온화하게 웃고 있는 눈매, 익숙한 입가의 주름. 그 모습이 너무 생생하여 금방이라도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환한 얼굴 위로 검은 띠가 둘러져 있었고, 타오르는 촛불과 자욱한 향 연기가 그가 더 이상 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음을 침묵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두 번의 절을 올렸다. 이마가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떨어지는 동안, 몸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서늘함이 지나갔다.
상주와 마주 앉아 맞절을 나누었다. 올라오는 길에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다듬었던 위로의 문장들이 목구멍 언저리에서 엉켜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겨우 뱉어낸 말은 짧고 메말랐다. 목은 잠겨 있었고, 내쉬는 숨은 문장 한가운데서 잘게 떨렸다. 손을 맞잡은 상주의 손끝은 핏기 없이 차가웠고, 그의 붉어진 눈시울에는 눈물조차 마른 깊은 탈진이 배어 있었다.
그 사람은 이 방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 단 하나의 거대한 빈자리가, 빈소에 모인 모든 이들의 자세와 목소리, 호흡과 시간을 완전히 다른 질서로 다시 배열하고 있었다.
상실은 단지 ‘없어짐’이 아니었다. 남겨진 자들의 몸과 관계 전체를 통째로 재편하는 가장 강력한 실재(實在)였다.
조문을 마치고 빈소 구석의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국과 밥이 차려져 나왔지만, 숟가락을 집어 든 손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가만히 짚어보았다.
숨을 들이마셔도 공기가 명치 아래로 깊게 내려가지 못하고 가슴팍 언저리에서 얕게 맴돌다 흩어졌다. 내쉬는 숨의 끝자락에는 나도 모르게 가늘고 긴 한숨이 섞여 나왔다. 목구멍 안쪽은 까끌하게 좁아져 있었고, 흉곽을 둘러싼 갈비뼈 사이의 근육들은 단단하게 오그라들어 폐가 온전히 펴지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말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시선은 바닥의 한 점과 영정사진 사이를 멍하니 오갈 뿐이었다.
슬픔이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먼저 생겨나 몸을 짓누르는 심리적 그림자일까.
아니면 지금 얕아진 숨, 굳어버린 목구멍, 움츠러든 어깨, 멈추어버린 식욕이라는 ‘몸의 상태 전체’가 곧 슬픔이라는 사건의 본질인 것일까.
빈소 한구석에 묵묵히 앉은 유가족들을 바라보며, 문득 슬픔의 두 얼굴을 헤아려 본다.
제단 앞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과 오열이 방금 마주한 상실의 충격에 몸이 무너져 내리는 ‘비(悲)’라면,
조문객이 뜸해진 늦은 밤, 멍하니 벽을 바라보며 그 사람 없이 맞이해야 할 내일의 아득함을 버텨내는 굳은 침묵은 ‘우(憂)’에 가까울 터였다.
비(悲)가 이미 떠나간 사람을 향해 지금 이 순간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라면, 우(憂)는 그 사람 없이 다가올 막막한 앞날을 미리 견뎌내는 몸의 짙은 그늘이었다.
슬픔은 흘러간 과거의 끝자락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문턱 양쪽에서, 남겨진 자의 몸을 가차 없이 접어 포개고 있었다.
문득 고전의학의 익숙한 오행 배속표가 머릿속을 스쳤다.
肺 — 金 — 秋 — 憂·悲 — 哭
『소문(素問)』 「음양응상대론(陰陽應象大論)」은 폐(肺)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在志爲憂. 憂傷肺,喜勝憂.」
(지(志)에 있어서는 우(憂)가 되고, 우(憂)는 폐(肺)를 상하며, 희(喜)는 우(憂)를 이긴다.)
장례식장에서 목격한 얕아진 숨, 잠겨버린 목소리, 한숨과 울음(哭)의 신체적 징후들을 떠올리면 이 오래된 상응(相應)의 질서는 유독 직관적이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질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우울이나 슬픔이라는 마음’이 허파라는 ‘해부학적 장기’를 일방적으로 파괴한다는 뜻일까?
감정과 장기를 1대 1의 단순한 도식으로 연결해 버리는 것만으로, 고전이 포착하려 했던 생명의 깊은 역동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문득 『소문』 「거통론(擧痛論)」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悲則氣消.」
(비(悲)하면 기(氣)가 소모된다.)
고전은 슬픔을 단순히 ‘마음의 병’이나 ‘폐 하나의 고장’으로 끝맺지 않았다. 그 뒤로 이어지는 조문은 슬픔 속에서 일어나는 온몸의 격렬한 연쇄 반응을 구체적인 생리적 언어로 묘사하고 있었다.
「悲則心繫急,肺布葉擧,而上焦不通,榮衛不散,熱氣在中,故氣消矣.」
(비(悲)하면 심장과 연결된 줄기(心繫)가 바짝 당겨지고, 폐엽(肺葉)이 치솟아 팽창하며, 상초(上焦)가 통하지 않고, 영위(榮衛)의 기운이 온몸으로 고루 퍼져나가지 못하며, 열기가 속에 갇히므로 기(氣)가 소모되는 것이다.)
이 문장은 심리적 감정을 묘사한 글이 아니었다.
상실을 맞이한 생명체가 흉곽을 조이고, 호흡의 길목을 가로막으며, 전신의 순환을 닫아걸고, 마침내 생명의 에너지를 고갈시켜 나가는 전신적 수축과 붕괴의 과정을 포착한 병리적 관찰 기록이었다.
지난 第6.5程에서 우리는 기(氣)를 신비로운 관념이 아니라, ‘환경과의 끊임없는 교섭 속에서 몸 전체의 물리·생리적 과정을 통합하여 다음 순간으로 이어가는 생명의 동적 작동성(dynamic operativity)’, 즉 ‘작동 중인 생명 그 자체’로 규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슬픔으로 인해 기가 소모된다는 기소(氣消)의 실체는 명백해진다.
기소(氣消)란 단순히 기운이 빠지는 활력의 저하가 아니다. 환경을 향해 뻗어 나가며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던 ‘생명의 동적 작동성 그 자체’가 거대한 단절 앞에서 안쪽으로 바짝 닫혀버려, 삶을 다음 순간으로 밀고 가던 동력이 서서히 소진되고 와해되어 가는 과정이다.
현대의 생리학 역시 사별과 깊은 애도의 순간에 몸이 겪어내는 거대한 변화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해 왔다.
극심한 상실을 겪을 때, 자율신경계는 균형을 잃고 요동치며, 호흡은 얕고 불규칙해지고, 면역 세포의 활성과 수면의 주기는 거칠게 흔들린다.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오는 흉부 압박감과 목구멍이 틀어막히는 감각은 뇌 속의 착각이 아니라, 심혈관계와 미주신경, 인두 근육이 실제로 겪어내는 신체적 사건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 생리학의 언어가 고전의 ‘비즉기소(悲則氣消)’를 완벽하게 입증했다고 과장할 수는 없다. 애도를 겪어내는 몸의 반응은 저마다의 삶의 궤적과 관계의 깊이에 따라 무수히 다른 양상을 지니기 때문이다.
다만 두 시선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지점은 분명했다. 애도하는 것은 머릿속의 뇌만이 아니었다. 호흡과 심장, 혈관과 점막, 근육과 면역에 이르기까지 온몸이 한 사람의 부재를 함께 앓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슬픔이라는 마음이 먼저 생겨나고, 그 결과로 몸의 숨이 얕아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하지만 장례식장의 긴 밤을 지키며 깨닫게 되는 것은, 몸과 마음을 그렇게 원인과 결과라는 단순한 도식(圖式)으로 나누는 설명의 한계였다.
한 사람의 죽음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뇌 속에 정보 하나가 입력되는 일이 아니다.
특정 시간이 되면 울리던 전화,
문을 열면 마주치던 시선,
지칠 때마다 기대었던 목소리,
당연하게 함께 걸어갈 것이라 믿었던 내일의 풍경.
그 사람을 향해,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던 내 몸의 모든 기대와 습관의 통로가 일순간에 허공 속으로 끊어져 나가는 사건이다.
몸은 더 이상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예상할 수도, 숨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
슬픔은 단지 마음속에 이는 감정의 물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해, 몸이 세상을 감지하고 관계 맺으며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 전체가 일순간에 붕괴하고 재편되는 ‘몸과 세계 사이의 거대한 사건’이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지난 第6程에서 머물렀던 카페의 풍경으로 되돌아갔다.
第6程에서 우리는 백(魄)을 ‘생명이 세계와 마주했던 흔적을 몸의 역치와 리듬으로 체화하여, 다음 반응을 새롭게 조직하는 체화된 생명 지능’으로 정의했었다.
그렇다면 상실이란 무엇인가.
고인과 함께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은 결코 뇌 속의 서랍에 갇힌 정적인 사진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맞춰 고개를 돌리던 목의 각도였고,
함께 밥을 먹던 숟가락의 속도였으며,
불안할 때 그 사람을 떠올리며 호흡을 가라앉히던 자율신경계의 오랜 길들임이었다.
고인은 이미 남겨진 이의 몸에 밴 호흡과 자세와 감각의 흔적 속에 체화되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사라졌다.
몸에 깃든 백(魄)은 여전히 그 사람이 존재하는 세계를 향해 온몸을 뻗고 있는데, 손끝에 닿는 것은 오직 차가운 허공뿐이다.
상실의 고통이란, 이미 사라져버린 대상을 향해 여전히 이전의 방식으로 작동하려는 몸의 습관과, 더 이상 그 사람이 곁에 없는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처절한 신체적 불협화음이었던 것이다.
가방에서 패드를 꺼내 『영추』 「본신」 편의 조문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폐(肺)는 곧 슬픔’이라는 단순한 등식을 뒤흔드는 깊은 문장들이 얽혀 있었다.
「肺,喜樂無極則傷魄.」
(폐는 희락이 다함이 없으면 백(魄)을 상한다.)
「肝,悲哀動中則傷魂.」
(간은 비애가 안에서 요동치면 혼(魂)을 상한다.)
『소문』 「선명오기편(宣明五氣篇)」에서는 정기(精氣)가 폐(肺)에 병적으로 모이면 비(悲)가 되고, 간(肝)에 모이면 우(憂)가 된다고도 했다.
슬픔은 폐(肺)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폐(肺)를 상하게 하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었다.
고전의 오행 배속은 감정마다 하나의 고정된 번지수를 붙여놓은 박제된 분류표가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정동(affect)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파동이 본래 어디서 비롯되어(在志), 어떻게 온몸의 기운을 뒤흔들며(氣機變化), 마침내 어느 장부와 정신의 질서를 무너뜨리는가(傷)를 다각도에서 관찰한 입체적인 지도였다.
시선이 다시 「희락무극즉상백(喜樂無極則傷魄)」의 두 글자, 무극(無極)에 멎었다.
고전은 왜 슬픔의 자리에서 기쁨을 말했을까. 그것은 감정의 도덕적 선악을 따지는 말이 아니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어떤 상태든 제때 매듭을 짓지 못하고(無極) 끝없는 팽창이나 소진으로 치달아,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마디(節)를 잃어버릴 때 생명의 질서는 무너진다.
第4程의 치절(治節)과 第5程의 병리가 가리켰던 진실이 이곳에서도 관통하고 있었다.
슬픔 그 자체가 죄가 되거나 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깊은 상실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숨을 줄이며 통곡하는 것은, 세계의 붕괴를 온몸으로 견뎌내기 위한 생명의 가장 정직하고 자연스러운 방어 반응이다.
진정한 병리는 슬픔의 깊이가 아니라, 그 슬픔이 다음 삶의 마디로 넘어가지 못한 채 영원히 닫힌 방 안에 갇혀버릴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도의 끝에서 도달해야 할 ‘복귀(復歸)’란 대체 무엇인가.
장례식장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이 ‘복귀’라는 단어는 참으로 가혹한 무게로 다가왔다.
상실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원상복구란 불가능하다. 고인이 살아 숨 쉬던 어제의 세계는 영원히 다시 오지 않으며, 그 부재가 남긴 몸의 흉터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애도의 복귀란 고인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망각도 아니며, 슬픔을 억지로 털어내는 극복도 아니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의 거대한 빈자리를 내 삶의 일부로 조용히 품어 안은 채, 그 부재의 바탕 위에서 다시 밥을 넘기고, 숨을 고르며, 남은 이들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새로운 안정의 축’을 만들어가는 길고 느린 여정이다.
그 길은 직선으로 뻗어 있지 않다. 다 나았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익숙한 계절의 바람, 옷깃에 스치는 냄새 하나에 불현듯 슬픔의 파도가 다시 밀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실패나 퇴보가 아니다. 생명의 복귀는 제자리를 맴도는 닫힌 원(圓)이 아니라, 부재의 무게를 품은 채 한 뼘씩 높이를 달리하며 나아가는 나선(螺旋)의 걸음이기 때문이다.
신경과학자 칼 프리스턴의 능동추론(active inference) 이론은 이 나선형의 걸음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현대적 시선을 제공한다.
생명체는 과거의 흔적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다음 세계를 예측하고, 실제 마주한 현실과의 간극(예측 오차)을 줄여가며 자신의 생존 질서를 유지해 나간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 예측과 조율의 과정을 어찌 머릿속 뇌만의 계산으로 국한할 수 있을까.
떠난 이는 신경망 어딘가에 박제된 기억의 파편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오랜 세월 나의 호흡과 자세, 식욕과 수면, 긴장과 이완의 역치를 함께 빚어온 ‘살아 숨 쉬는 세계’ 그 자체였다.
머리의 의식은 이미 그의 부재를 선고받았지만, 몸 전체의 백(魄)은 여전히 그가 존재하고 응답하던 세계를 향해 이전의 관성대로 능동적인 예측의 손길을 뻗어 올린다. 닿지 않는 손끝과 텅 빈 공기 사이, 그 거대한 예측의 어긋남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이야말로 온몸의 숨을 틀어막고 기운을 소진시키는 기소(氣消)의 정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도의 끝에서 마주하는 복귀란, 단순히 뇌 속의 정보만 갱신하는 인지적 수정이 아닐 것이다.
그 사람과 함께 오랜 세월 직조해 왔던 몸 전체의 체화된 세계 모형을, ‘그의 영원한 부재’라는 냉혹한 현실 위에서 새로운 질서와 리듬으로 다시 엮어 나가는 묵묵하고 지난한 생명의 여정이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빈소 안으로 새로운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모여 발인(發引) 시간을 확인하고, 운구의 순서를 정하며, 남은 음식과 제기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탈진한 상주의 어깨를 감싸 쥐며 따뜻한 물 한 컵을 건넸고, 누군가는 묵묵히 흩어진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장례라는 오래된 사회적 의례는,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추어버린 남은 자들의 몸에게 ‘다음에 해야 할 행동의 마디(節)’를 하나씩 쥐여주는 지혜였는지도 모른다.
울어도 되는 시간,
말없이 곁을 지켜도 되는 자리,
죽은 자를 온전히 떠나보내고 산 자는 다시 일상의 문을 열고 돌아가야 한다는 엄정한 경계.
장례식장은 죽음이 머무는 끝의 공간인 동시에, 남겨진 생명들이 다시 시간의 흐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위해 숨을 가다듬는 거대한 전환의 문턱이었다.
장례식장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의 차고 맑은 공기가 폐포 깊숙한 곳까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밤새 얕게 굳어 있던 가슴이 서늘한 숨을 들이마시며 비로소 길게 팽창했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저편 하늘 아래로,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가방에서 패드를 꺼냈다. 가운데에 그어두었던 짙은 세로선, 그 왼쪽의 백(魄)과 오른쪽의 폐(肺)의 感情(감정)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더 이상 그 선을 둘을 갈라놓는 단절선으로 보지 않았다.
펜을 들어 두 칸을 커다랗게 감싸 안는 둥근 원 하나를 그렸다.
그 원은 둘을 억지로 뒤섞어버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몸의 무의식적 생명지능인 백(魄)과, 의미의 세계를 살아내는 감정이 애초에 분리된 두 개의 부품이 아니라, 세계와 마주한 하나의 생명이 겪어내는 거대한 사건의 ‘서로 다른 두 단면’이었음을 비추기 위함이었다.
분이불리(分而不離), 통이불혼(通而不混).
(나뉘어 있으되 떨어지지 않고, 통하되 뒤섞여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감정은 몸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불청객이 아니었다. 감정은 과거의 역사를 온몸에 새긴 한 생명이, 상실이라는 거친 세계의 벼랑 끝에서 숨 쉬고, 감각하고, 아파하며, 다시 살아가기 위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그리고 백(魄)은, 그 처절한 삶의 궤적이 몸의 경계와 리듬 위에 어떻게 새겨지고 있는가를 묵묵히 증언하는 가장 깊고 원초적인 생명의 눈동자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렇게 아무리 머리로 따져보고 설명해봐도,
남겨진 자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그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임을.
차갑게 비워진 허파 속으로, 새벽의 새로운 숨 하나가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溫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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