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谷의 따뜻한 생명 읽기

肺 폐로 가는 길 · 제12편

第9程. 갈라지는 길, 이어지는 몸

폐(肺)로 가는 길은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溫谷 · · 17분

새벽 네 시 반, 시동을 걸자 엔진 소리가 고요한 지하 주차장에 낮게 울렸다.

트렁크에 가방 하나를 싣고 길을 나섰다. 강원도 양양을 거쳐 설악산 남쪽 자락, 한계령과 오색으로 가는 길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설악 단풍이 이번 주말 절정이라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고속도로 전광판에는 이른 새벽부터 단풍객들로 영동고속도로가 막힐 것이라는 안내가 떠 있었다.

수도권 남쪽 나들목을 빠져나와 영동고속도로 본선에 올랐다. 도시의 불빛이 멀어지고 회색 방음벽이 드문드문 끊길 때마다, 차창 밖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산 능선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차창을 조금 내리자 서늘한 새벽 공기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히터를 켜기에는 아직 답답했고, 창을 활짝 열기에는 제법 날카로운 날씨였다. 계절의 변화는 달력의 날짜로 오지 않았다. 그것은 빛의 각도와 나뭇잎의 색을 바꾸고, 어느새 숨을 들이쉴 때 닿는 점막과 호흡의 감각 속으로 스며들었다.

원주가 가까워지자 내비게이션 화면에서 한참 앞 구간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앞차와의 거리는 넉넉했다. 속도계 바늘은 시속 100킬로미터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눈앞의 아스팔트만 보면 아무 문제도, 지체도 없는 평온한 아침이었다. 그러나 화면 속 붉은 선은 아직 닿지 않은 수십 킬로미터 앞에서 이미 큰 정체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절정인 단풍을 즐기려 새벽부터 몰려든 차량 행렬, 좁아지는 차선, 또는 어느 굽잇길에서 일어난 작은 접촉사고가 저 먼 곳의 흐름을 더디게 만들고 있을 터였다. 아직 내 차에까지 여파가 미치지 않았지만, 그 지체의 파동은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이미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문득 우리 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눈앞의 차선은 평온했다. 그러나 그 평온함만으로 도로 전체의 상태를 알 수는 없었다. 내가 달리는 구간과 화면 속 붉은 정체 구간은 같은 도로망 안에 있었다.

기침이 나면 우리는 먼저 허파를 떠올린다. 그런데 기침하는 몸을 살펴보면, 허파와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가슴과 목, 어깨와 팔에서도 변화가 함께 나타나곤 한다. 한 곳의 증상을 이해하려면 그곳과 이어진 몸의 다른 부위의 상태도 함께 살펴야 하지 않을까.

“잠시 후 오른쪽 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 춘천 방면으로 진출하십시오.”

안내에 따라 방향지시등을 켜고 만종분기점의 길고 완만한 곡선 램프를 돌아나갔다. 조금 전까지 시원하게 동쪽으로 뻗어 있던 영동고속도로 본선이 차창 오른쪽 아래로 멀어져 갔다. 길의 이름이 바뀌고 진행 방향이 북쪽으로 바뀌었어도 차는 멈추지 않았다.


그 분기점을 지나면서, 나는 지금까지 걸어온 폐(肺)의 여정을 잠시 돌아보았다.

第1程부터 第8程까지, 우리는 주로 장상(臟象)이라는 지도를 펼쳐 놓고 폐(肺)를 따라갔다. 그 길은 해부학에서 말하는 허파라는 장기 하나에만 갇히는 길이 아니었다. 폐는 기(氣)를 주관했다. 피모(皮毛)와 주리(腠理)라는 몸의 경계를 다스렸다. 몸속 수액이 흐르는 통로인 수도(水道)를 소통시켰다. 백맥(百脈)을 모아 리듬을 맞추었다. 슬픔과 백(魄)이라는 생명의 지능을 품었다. 우리는 이런 폐를 일종의 ‘생리적 기능 모델’로 탐구한 것이다.

그런데 몸에는 장상과는 또 다른 시선으로 그린 오래된 지도가 한 장 더 있었다. 장상이 장부가 몸 깊은 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묻는 지도라면, 또 하나는 장부의 기능 변화가 몸의 안팎과 위아래, 팔과 다리 끝을 지나면서 어디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묻는 지도였다.

바로 경락(經絡)의 지도였다.

한의학 역사에서 장상과 경락은 인체를 이해하는 두 큰 기둥이었다. 둘은 서로 깊이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출발한 질문은 서로 달랐다.

장상은 주로 약물과 처방을 운용하는 방식과 함께 발전했다. 그래서 오장육부의 기능이 부족한지 넘치는지, 기와 혈이 어떻게 작동하고 변하는지를 읽어내는 언어가 되었다.

경락은 주로 침과 뜸으로 치료하는 방식과 함께 발전했다. 그래서 병의 반응이 몸 표면 어디에 나타나고 어떤 경로로 퍼지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조절하는 고유한 변증(辨證), 즉 병의 상태를 판단하는 체계를 세워 왔다.

차창 밖으로 중앙고속도로의 갓길이 길게 이어졌다. 갓길 가장자리를 따라 반사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내비게이션의 남은 거리 숫자가 조용히 줄어들고 있었다. 도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그 위를 달리는 차는 어느새 다른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있었다.

장상이 인체의 생명 활동을 오장육부라는 기능적 중심들의 유기적 연관성으로 묶어낸 지도라면, 경락은 기혈의 운행과 병리적 반응이 몸의 안팎과 중심, 사지를 종횡으로 관통하며 만드는 연결의 관계를 기록한 지도였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어느 쪽이 실제 해부학적 구조와 더 비슷한지 따져 우열을 가릴 문제는 아니다. 경락을 혈관이나 신경, 또는 최근에 주목받는 근막의 연속성 가운데 하나와 같다고 보려는 해석은, 경락이 지닌 복합적인 현상의 차원을 좁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경락을 현대 과학의 검증을 벗어난 신비한 에너지 통로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도 진지한 탐구의 길은 아니다.

살아 있는 몸은 하나였다. 그러나 그 몸을 읽어내려던 옛사람들의 질문은 여러 갈래였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경락을 이렇게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경락은 장부의 기능과 병리적 변화가 살아 있는 몸의 공간을 따라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고 드러나는지를, 오랜 세월 동안 기록해 온 몸 안의 ‘관계와 경로의 지도’다.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는 길, 머리 위로 녹색과 파란색 고속도로 표지판이 일정한 간격으로 스쳐 갔다. 표지판에 적힌 노선 번호와 지명이 강원도의 험준한 산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 압축된 기호들이 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길의 갈래와 방향을 가늠하며 목적지까지 나아갈 수 있다.

표지판의 기호가 산의 실물을 다 담지 못하듯, 고전의학이 오행(五行)을 다루는 방식도 그러했다.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는 자연계를 이루는 다섯 가지 기본 물질로 여겨졌지만, 이를 인체의 장기에 기계적으로 짝지은 대응표로만 읽으면 한의학의 생리적 사고는 단편적인 비유에 갇히고 만다.

오행은 사물의 성분표가 아니다. 오행은 생명 현상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발생·확장·전환·수렴·저장이라는 움직임의 양식과 그 관계망을 설명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쓰여 온 상징 언어다.

태어나 솟구치며 펼쳐지는 발생의 힘(木),
끝까지 확장하여 꽃피우는 확장의 힘(火),
성장이 극에 이른 자리에서 흐름을 돌려세우는 전환의 힘(土),
거두어들여 응축하고 질서를 세우는 수렴의 힘(金),
그리고 깊이 갈무리하여 새 생명을 품는 저장의 힘(水).

폐(肺)가 금(金)에 속한다는 것은 폐가 쇳덩어리라는 뜻이 아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확장을 거두어들이고, 기운을 안으로 모아 아래로 내려보내며, 흩어진 것들의 경계를 짓는 ‘가을의 수렴적 성질’을 폐의 생리가 온몸에서 맡는다는 뜻이다.

상생상극(相生相克) 또한 한 장기가 다른 장기에 힘을 실어 주거나 쳐서 이긴다는 전쟁의 구도가 아니다. 낳고 기르는 힘(生)과 억누르고 제어하는 힘(克)이 서로 맞물려, 생명이 어느 한쪽으로 끝없이 치닫지 않도록 살아 있는 균형을 지켜 내는 생리적 조절의 원리다.

지금 우리는 폐금(肺金)의 자리에 서 있다. 눈앞에는 간목(肝木), 비토(脾土), 신수(腎水), 심화(心火)로 뻗어나가는 표지판들이 보인다. 그러나 오늘은 그 갈림길들을 서둘러 다 헤아리지 않겠다. 훗날 다른 장기들을 순례하며 실제 생리와 병리를 마주할 때, 하나씩 차분히 밟아갈 길이기 때문이다.


차는 치악산 서쪽 기슭을 끼고 횡성을 지나 북쪽으로 달려 올라갔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빼며 『영추(靈樞)』 「경맥(經脈)」 편에 적힌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의 문장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肺手太陰之脈,起於中焦,下絡大腸,還循胃口,上膈,屬肺……」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은 중초(中焦)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대장(大腸)에 연락하고, 다시 위의 들문(胃口)을 돌아 가로막(膈)을 뚫고 올라가 폐(肺)에 속한다.)

이 문장을 처음 마주할 때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출발점이다. 폐(肺)의 경락은 정작 가슴속 허파가 아니라, 배 한가운데의 소화기 영역인 중초에서 시작된다. 아래로 내려가 대장을 감아 돌고(絡), 다시 위의 들문(胃口)을 거친 뒤에야 횡격막을 뚫고 올라와 폐에 닿아 자기 집으로 삼는다(屬).

어머니 태중에서 원시 소화관의 한 지점이 작은 주머니처럼 부풀어 올라 호흡을 맡는 폐로 뻗어 나갔던 일. 第3程에서 살폈던 장내 미생물 생태계와 폐의 면역 경계가 쉼 없이 신호를 주고받던 일이 함께 떠올랐다.

물론 고대 의가들이 현대 발생학의 배아 분화 과정이나 장내 미생물의 대사산물을 현미경으로 관찰했을 리는 없다. 그들이 현대 과학의 발견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고 억지로 끌어다 붙일 생각도 없다.

그러나 해부용 메스나 정밀한 센서가 없던 시절에도, 옛 의가들은 살아 있는 몸을 관찰했다. 그들에게 호흡의 뿌리는 배 속에서 음식물이 소화되고 배설되는 자리와 분리될 수 없는 길로 이어져 있었다.

춘천분기점이 가까워질 무렵, 생각은 경락의 다음 구간으로 옮겨 갔다. 폐에 속한 기운은 이제 몸속 장부에서 몸 바깥으로 뻗어 나온다.

그 기운은 후두와 기관지(肺系)를 거쳐, 쇄골 아래 가슴 바깥 표면으로 솟아오른다. 그리고 겨드랑이 밑을 돌아 위팔 안쪽을 타고 내려가며, 팔꿈치 안쪽 힘줄을 지나, 아래팔 요골을 따라 손목의 맥이 뛰는 곳을 거쳐 엄지손가락 끝으로 빠져나간다.

이 길 위에 점점이 찍혀 있는 열한 개의 혈자리, 즉 경혈(經穴)은 경락 위에 자리한, 생명의 동적 작동성인 기(氣)가 드나들고 머무는 지점이다. 그 이름을 교과서처럼 외울 필요는 없다. 다만 그 길목들이 몸의 어떤 관절과 매듭을 지나며 흔적을 남기는지 가만히 짚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몸 안의 깊은 호흡이 가슴 바깥 표면으로 처음 터져 나오는 관문인 중부(中府)와 운문(雲門).

팔이 굽혀지고 펴지는 가장 큰 관절의 안쪽에 자리 잡아, 기(氣)의 흐름을 조절하는 깊은 못과 같은 척택(尺澤).

본래의 큰 줄기에서 곁가지 하나를 뻗어내어 표리(表裏)를 이루는 대장(大腸)의 길로 소통을 이어주는 낙혈(絡穴)인 열결(列缺).

손목 안쪽에서 온몸 백맥(百脈)의 파동을 손가락 끝의 감각으로 가늠하는 경거(經渠)와 태연(太淵).

그리고 손바닥 엄지 쪽 도톰한 살집을 지나, 엄지손톱 바깥 모서리에서 하나의 유주(流注)를 완성하는 어제(魚際)와 소상(少商).

숨이 차오르면 사람들은 왜 무의식적으로 가슴 윗부분을 움켜쥘까. 기침이 터질 때 왜 어깨 앞쪽에서 팔 안쪽을 타고 손목까지 찌릿한 감각이 뻗어 나갈까. 옛 의가들은 놀라운 관찰력으로 그 살아 움직이는 감각의 흐름을 읽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유려한 선으로 길어 올렸다.

가슴 깊은 곳의 폐는 팔과 손목을 지나 엄지손가락 끝까지 하나의 연속된 몸의 공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춘천분기점에서 핸들을 꺾어 서울양양고속도로 양양 방면으로 접어들었다.

영동고속도로에서 중앙고속도로로, 다시 서울양양고속도로로. 도로의 이름은 세 번이나 바뀌었다. 행정구역 경계도 몇 번이나 넘었다. 그러나 차바퀴가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흐름은 단 한순간도 끊기지 않았다.

몸의 질서도 마찬가지였다. 옛사람들은 장부, 경맥, 경혈에 이름표를 붙였다. 그러나 그것들이 서로 분리된 부품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변화가 몸 깊은 곳을 지나 표면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자리에 따라 서로 다른 감각과 증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뿐이다.

인제와 양양을 잇는 백두대간의 험준한 구간으로 접어들자, 크고 작은 터널들이 쉼 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터널 안으로 들어서면 차창 밖의 산천은 일순간 사라졌다. 콘크리트 벽면과 주황빛 나트륨등 불빛, 혹은 차가운 LED 불빛만이 단조롭게 이어졌다. 그 어둠의 통로에서는 바깥 세상의 숲이 어떤 빛깔로 물들어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터널을 빠져나올 때마다 새로운 산자락이 나타났다. 어떤 비탈은 아직 푸르렀고, 어떤 능선은 붉고 노란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풍경은 짧고 선명했다. 그 몇 장면만으로 산 전체가 가을을 지나는 모습을 다 알 수는 없었다. 몸의 증상을 기록한 문장들도 그랬다. 눈에 들어오는 색채 너머로 비탈의 방향과 햇빛, 바람과 물기, 나무마다 다른 조건들이 함께 얽혀 있었다. 단편적인 증상 뒤에도 몸 전체의 복잡한 관계가 숨어 있었다.

가슴이 답답하다. 기침이 난다. 팔 안쪽이 아프다.

각각의 문장은 분명한 경험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경험을 드러나게 한 몸 전체의 관계까지 문장 하나에 다 담겨 있지는 않았다. 환자가 삶의 공간에서 몸으로 겪는 감각과, 그 감각을 듣고 살피는 의자(醫者)의 관찰은 같은 몸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비추고 있었다.

여기서 문득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말한 '세계에의 존재(être au monde)'로서의 몸이 떠올랐다. 그는 몸을 해부학적 대상이 아니라, 늘 세계를 향해 열린 채 세계와 얽혀 살아가는 주체로 보았다. 그렇게 본다면, 몸의 한 부위가 아프다는 것은 그 부위만의 고장이 아니라 환자의 몸과 세계 사이의 관계가 흔들리는 일로 읽힐 수 있었다.

내게 "가슴이 답답하다"는 말은 폐(肺)라는 장기의 이상을 알리는 문장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몸이 세계와 주고받던 호흡의 리듬이 어딘가에서 막혔다는 호소처럼 들렸다. "팔 안쪽이 아프다"는 말에서도, 나는 팔의 근육 하나보다 몸의 어떤 경계가 긴장하고 있다는 신호를 먼저 읽고 싶었다.

어쩌면 증상은 고립된 신호이기 전에, 몸이 자신의 상황을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그 언어를 읽는 일은 살아 있는 몸이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의 지도를 다시 그려 보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아직 조심스러운 생각이지만, 몸과 세계는 그렇게 긴밀하게 얽혀 있는 듯했다. 증상은 그 얽힘이 어긋날 때 몸이 내는 반응일 것이다. 그렇다면 증상을 읽는 일은 장기의 이상 여부를 따지는 데서 멈출 수 없다. 그 몸이 삶의 시공간 속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 일이 몸과 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흔들었는지까지 함께 물어야 한다. 증상은 그 흔들림이 몸이라는 살아 있는 자리에 남긴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 쉼 없는 어둠의 끝, 국내에서 가장 긴 인제양양터널을 마침내 뚫고 나왔다. 차창 밖으로 설악의 남쪽 자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감탄이 터져 나왔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빛, 따스한 주황빛, 맑은 노란빛, 그리고 아직 계절의 미련을 놓지 못한 짙푸른 녹색이 험준한 바위 능선과 골짜기마다 층을 이루며 장엄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단풍 구경을 온 사람들은 산을 바라보며 “단풍이 물들었다”고 감탄했을 것이다. 나 역시 한동안 그 빛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붉은 단풍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나무는 계절을 건너고 있었다. 짧아지는 햇빛과 차가워지는 공기 속에서 잎의 빛깔이 달라지고, 잎을 떠나보낼 채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게 달라진 나무의 몸은 다시 햇빛과 물을 받아들이고 추위를 견디는 조건이 된다. 눈앞의 색채에도 그런 관계가 담겨 있는 듯했다.

나무의 몸이 그렇다면, 병든 몸도 그럴 것이다. 삶의 사건에 응답한 몸의 변화가 지금의 몸을 만들고, 그렇게 달라진 몸이 다시 몸의 작동을 가능하게도 하고 제약하기도 한다. 그러니 몸의 병을 바라볼 때도 두 질문을 함께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생명은 어디에서 어떻게 어긋나고 있는가.
그 어긋남을 낳기도 하고 막기도 하는 몸은 어떤 상태인가.

증상 하나에 붙은 이름을 읽은 뒤에도, 그 증상을 겪는 몸을 향한 질문은 계속되어야 할 것 같았다.

이 가을 풍경 속에서, 폐금(肺金)이라는 고전의학의 상징이 지닌 깊이가 살아났다.

‘가을=금(金)=폐(肺)’라는 도식은 책상 위의 공허한 대응표가 아니었다. 여름 내내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성장의 욕망을 멈추고, 더 이상 필요 없는 잎들을 미련 없이 떨구어내며, 생명의 알맹이만 안으로 수렴(收斂)하고 하강(下降)시켜 새로운 계절의 경계를 준비하는 생명 질서의 엄정한 전환.

그것이 가을이 보여주는 모습이자, 우리 몸 안에서 폐(肺)가 한 호흡마다 맑은 기운을 아래로 내리누르는 숙강(肅降)의 모습이다.


오색의 산자락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이튿날 아침, 양양 요금소를 지나 다시 길 위에 올랐다. 양양분기점에서 서울양양고속도로의 끝자락은 동해고속도로와 매끄럽게 합류했다. 차는 이제 푸른 가을 바다를 왼편에 두고 강릉을 향해 남쪽으로 시원하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달리며, 나는 전날 곱씹었던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其支者,從腕後直出次指內廉,出其端.」
(그 갈라진 가지는 손목 뒤에서 곧게 나와 검지의 엄지 쪽 가장자리를 따라 그 끝으로 나간다.)

엄지손가락 끝 소상(少商)에서 끝난 줄 알았던 폐(肺)의 길은, 손목 뒤 열결(列缺)에서 가는 가지 하나를 뻗어 검지손가락 끝 상양(商陽)으로 건네주고 있었다.

검지 끝 상양은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이 비로소 태동하는 자리다. 음(陰)의 극치인 태음폐경(太陰肺經)이, 손가락 끝이라는 몸의 가장 먼 변방에서 양(陽)의 기운이 가득한 양명대장경(陽明大腸經)과 손을 맞잡는 순간이다.

검지 끝에서 출발한 대장경(大腸經)은 팔 바깥쪽을 타고 어깨와 목을 지나, 얼굴의 코 옆 영향(迎香)으로 솟구쳐 오른다. 그 길에서 갈라진 또 한 줄기는 어깨 위 결분(缺盆)에서 몸속 깊이 파고들어 폐(肺)를 감싸 안고(絡), 본래의 집인 대장(大腸)에 속한다(屬).

폐와 대장의 표리(表裏) 관계를 ‘기침을 하면 변비가 생긴다’거나 ‘대변을 잘 봐야 숨이 편해진다’는 식의 단순한 증상 공식으로 좁혀서는 안 된다.

두 장부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가장 큰 ‘경계’를 이루는 내외지간(內外之間)이었다. 가슴속 폐(肺)가 기체라는 가장 미세하고 투명한 바깥 세계를 들이마시고 내보내는 호흡의 경계라면, 아랫배의 대장(大腸)은 음식물이라는 가장 거칠고 물질적인 바깥 세계를 받아들이고 남은 찌꺼기를 세상 밖으로 돌려보내는 배설의 경계다.

받아들임과 내보냄, 맑음과 탁함, 안과 밖. 생명이 세계와 만나는 두 개의 큰 문지방이 손가락 끝의 미세한 경락(經絡)을 통해 밤낮없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다.

폐(肺)의 경계를 따라가다 보니, 그 길의 끝자락에는 이미 대장(大腸)이라는 또 다른 세계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동해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차창 너머로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나들목 표지판들이 푸른 가을 하늘 아래로 스쳐 갔다. 그 표지판들을 바라보며 나는 폐(肺)와 얽힌 다른 경맥(經脈)들의 보이지 않는 길들을 마음속으로 가만히 그려 보았다.

발에서 시작하여 폐(肺)와 함께 ‘태음(太陰)’이라는 이름을 나누어 가진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의 길.
몸의 가장 깊은 곳인 신(腎)에서 위로 올라 간과 횡격막을 뚫고 폐(肺) 속으로 스며드는 족소음신경(足少陰腎經)의 길.
간에서 갈라져 나와 횡격막을 뚫고 올라와 폐(肺)에 닿음으로써, 기(氣)의 오르내림에서 순환의 짝을 이루는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의 길.
그리고 심장 깊은 곳의 심계(心系)에서 뻗어 나와 폐(肺)를 스치며 겨드랑이로 향하는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의 길.

하지만 오늘 나는 그 표지판들을 따라 곁길로 빠지지 않았다.

비(脾)와 폐(肺)가 나누어 가진 태음(太陰)의 습(濕)과 조(燥), 신(腎)이 호흡의 뿌리가 되는 신주납기(腎主納氣), 간(肝)이 오르고 폐(肺)가 내리는 간승폐강(肝升肺降), 심(心)과 폐(肺)가 얽히는 기혈(氣血)의 작동 원리. 이 이야기들은 나중에 각각의 장부를 다루는 자리로 미루어 두어도 충분하다.

표지판을 하나하나 다 살피다가는 이번 여행은 끝을 맺지 못할 터였다. 지금은 그저, 폐를 향해 열린 길들이 몸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침내 강릉분기점에 도달했다.

동해고속도로의 곧게 뻗은 주로를 빠져나와 둥근 램프를 돌아, 영동고속도로의 서쪽 방향인 인천 방면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어제 새벽 처음 올랐던 바로 그 길로 되돌아온 것이다.

출발할 때 내 눈에 비친 영동고속도로는 서울에서 강릉으로 향하는 단조로운 아스팔트 직선 도로에 불과했다. 그러나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라져 나가고, 춘천에서 서울양양고속도로를 거쳐 동해의 바닷길을 밟고 돌아온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영동고속도로는 어제의 그 길이 아니었다.

직선으로만 보였던 그 길은 이제 다른 길들과 갈라졌다가 다시 만나는 순환의 한 자락이었다. 만종에서 떠나보낸 흐름이 먼 길을 돌아 강릉에서 다시 이 길로 들어왔다. 영동고속도로는 그렇게 이어진 거대한 연결망의 한 매듭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장상(臟象)의 폐(肺) 역시 그러했다.

우리는 지난 여정 동안 폐(肺)라는 장부 하나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 폐(肺)는 홀로 존재하는 해부학적 장기에 머물지 않았다. 배 속 중초(中焦)에서 싹을 틔우고, 대장(大腸)과 안팎의 경계를 이루며, 손끝의 경락(經絡)으로 자신의 징후를 드러내는 존재. 그것이 우리가 여정에서 만난 폐(肺)였다.

경락은 장상을 부정하거나 버리는 새로운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깊이 들여다보았던 폐(肺)를 몸 전체라는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서 비로소 입체적으로 다시 만나게 하는 또 하나의 지도였다.

대관령을 넘어서자 한낮의 가을볕이 고갯마루 위로 환하게 쏟아졌다. 차갑게 불어오던 늦가을 바람을 타고, 붉게 물든 활엽수의 마른 잎들이 영동고속도로 갓길을 따라 바스락거리며 뒹굴어 갔다.

나무는 잎을 아낌없이 떨구어냄으로써 혹한의 겨울을 건널 힘을 얻는다. 가지에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저 낙엽은 생명의 끝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잎은 썩어 거름이 되고, 다음 봄 피어날 새싹을 기를 것이었다.

가을이 거두어 내린 것을 겨울이 갈무리하고, 그 힘으로 봄이 다시 움튼다. 폐(肺)가 거두어 내린 기운도 그렇게 폐(肺)에 머물지 않고 다음 장부로 이어진다.

이윽고 만종분기점의 초록 표지판이 반갑게 다가왔다. 어제 새벽 어둠 속에서 이 길이 처음 갈라져 나갔던 자리였다. 그때는 보이지 않던 갈래들이 이제는 환히 보였다.

폐(肺)로 가는 길은 폐(肺)에서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