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谷의 따뜻한 생명 읽기

肺 폐로 가는 길 · 제7편

第5程. 엇갈리는 마디

특이 소견 없음, 몸은 왜 돌아오지 못하는가

溫谷 · · 11분

어깨에 걸친 노트북 가방이 걸음마다 골반뼈 언저리를 툭, 툭 쳤다. 그 안에서 빳빳한 서류 봉투의 모서리가 배기듯 함께 흔들렸다.

그 봉투 안에는 며칠 전 대학병원에서 받아 온 검사 결과지가 들어 있었다. 혈관을 파고들던 차가운 바늘, 젤을 바르고 명치와 옆구리를 문지르던 초음파실의 어둠, 가슴에 붙였던 전극의 끈적한 자국, 그리고 수면 내시경을 마치고 깨어났을 때 입안에 감돌던 떫은 약 기운까지.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은 뒤, 의사가 건넨 말은 명료했다.

“피검사, 심전도, 내시경 모두 깨끗합니다. 별다른 이상이 없으니 당분간 무리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분명 안도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특이 소견 없음’이라는 활자 앞에서도 내 몸은 조금도 편안해지지 않았다.

종이 위의 나는 더없이 건강하고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 하얀 종이 위 어디에도, 매일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를 옥죄는 이 기묘한 불협화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유리문 손잡이를 잡고 밀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채 가시기 전에, 은은한 한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망설임을 털어내듯 안으로 들어섰다.

대기실은 고요했다. 구석에서 공기청정기가 나직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계피와 당귀 향이 옅게 밴 온기가 문 밖의 메마른 바람을 지워주었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고개를 들자, 맞은편 벽면 거울 속에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생각보다 말쑥했다. 며칠 밤을 설쳐 눈 밑이 조금 거뭇할 뿐, 어디가 크게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대기실에 띄엄띄엄 앉아 있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으면, 그저 뻐근한 허리나 어깨 때문에 침 치료를 받으러 온 평범한 사람으로 보일 터였다.

하지만 그 멀쩡한 겉모습 속에서, 내 몸은 어느 하나로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협화음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분명 피곤한데 눕는 순간 정신이 깨어나고, 배는 고픈데 막상 입에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다. 손으로 짚어 가리킬 수 있는 자리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아픔도 아니었다. 그저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서로의 손을 놓쳐버린 듯한 막막한 어긋남만이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분명 온몸으로 겪어내는 고통인데, 손끝으로 짚을 수 있는 자리도,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병도 없었다.

“들어오세요.”

진료실 문이 열리고, 안쪽 책상 앞에 앉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의사가 차트 위에 만년필을 올려놓으며 담담하게 첫 질문을 건넸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들이 혀끝에서 엉켰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증상이 소용돌이쳤지만, 정작 ‘어디’라고 지목할 부위 하나를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딱 꼬집어 어디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슴이 찢어질 듯 기침을 쏟아내는 것도 아니고, 심장을 쥐어짜는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며, 위장이 굳어 경련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어떤 날은 얕은 숨과 두근거림에 진땀을 흘리고, 어떤 날은 밤을 꼬박 새우는 불면에 시달리며, 또 어떤 날은 명치 끝이 꽉 막힌 듯한 답답함과 정체 모를 불안에 짓눌린다.

증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증상이 온몸에 흩어져 있는 데다, 시간과 상황에 따라 서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요동치고 있었기에 어느 장기 하나를 붙들고 하소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픈 곳을 하나로 집어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이 몸이 온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의사는 섣불리 병명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손목의 맥을 짚으며, 내 일상 속의 작고 모순된 감각들을 하나씩 조심스레 헤아려 나가기 시작했다.

“식사는 어떻습니까? 끼니는 잘 넘어가나요?”
“배는 고픈 것 같은데…… 막상 밥상을 마주하면 몇 숟가락 뜨지도 못하고 물려버립니다.”

“잠자리는 편안하신지요?”
“낮에는 종일 멍하고 천근만근인데, 자려고 누우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정신이 말똥말똥해져서 새벽까지 뒤척입니다.”

“움직이거나 쉬실 때 몸 상태가 달라집니까?”
“가만히 있으면 가슴이 조여와 밖으로 나가는데, 막상 조금만 걸어도 다리에 힘이 풀려 금세 돌아오고 싶어집니다.”

“열이 오르거나 춥지는 않고요?”
“얼굴과 가슴 쪽으로 열이 훅 달아오르는데 체온을 재보면 정상이고요. 으슬으슬 춥다가도 막상 옷을 껴입으면 속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대소변은 어떻습니까?”
“대변도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날은 며칠 답답하다가, 또 어떤 날은 별 이유 없이 묽어지고요. 소변도 평소보다 자주 보는 날이 있습니다.”

문답이 이어질수록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스스로에게조차 기괴하게 들렸다. 대기실에서는 뭐라 표현할 수 없어서 뭉갰던 그 모순된 감각들이, 한의사의 낮은 목소리를 따라 이렇게 또렷한 문장으로 끌려나올 줄은 몰랐다.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고,
자고 싶은데 잠들지 못하며,
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이지 못한다.

하나의 욕구가 일어나면 그에 맞는 다음 상태로 자연스레 이어져야 마땅한데, 내 몸 안에선 앞선 상태와 뒤따라야 할 상태가 사납게 엇갈리며 충돌하고 있었다.

몸의 기능 자체가 고장 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화하는 힘도, 잠드는 힘도, 걷는 힘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듯했다. 문제는 그 힘들이 필요한 순간에 서로 맞물리지 못한다는 데 있지 않을까. 한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어딘가의 마디가 자꾸만 빗나가는 듯했다.

가방에서 검사 결과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한의사는 검사지의 수치들과 그래프를 담담히 넘겨보았다.

“큰 이상이 없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검사에 안 잡힌다고 해서 불편한 게 없는 건 아니니까요. 처음 이상하다고 느낀 게 언제였는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몸 상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 번 말씀해보시겠어요?”

그 질문을 들으며 결과지를 내려다보았다.

현대의학의 검사는 치명적인 기질적 손상을 확인하고 배제하는 데 더없이 든든한 기준이다. 그러나 검사 기계가 찰나의 단면을 찍어내는 동안, 환자가 겪어내는 삶의 시간 속에서는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 미세한 흐름과 감각의 결들이 끊임없이 일렁이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제 살펴야 할 것은 결과지에 찍힌 한순간이 아니라, 그 전후로 내 몸이 지나온 과정은 아닐까.


기억의 시계가 저절로 지난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모든 균형이 처음 무너졌던 그날, 第3程의 출장길이었다.
지연된 일정과 숨 막히게 하는 실적 압박이 쏟아지던 회의실에서, 내 턱관절은 단단히 굳어 있었고 명치에는 돌덩이를 얹은 듯 막혀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 안에서 끝내 복통이 터져 나왔고, 휴게소 화장실에서 속을 전부 쏟아내고 나서야 비로소 한숨을 돌린 줄 알았다.

하지만 몸은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위장의 더부룩함 뒤를 이어 숨이 얕아졌고, 가슴의 두근거림과 불면이 꼬리를 물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방적으로 망가뜨렸다기보다, 한 곳에서 시작된 균열이 파동처럼 온몸으로 번져나간 느낌이었다.

第4程에서 되새겼던 호흡의 이치가 스쳐 지나갔다. 건강한 리듬이란 위급한 순간 박자를 한껏 끌어올렸다가도, 자극이 지나가면 다시 본래의 잔잔한 축으로 돌아오는 ‘유연한 복원력’에 있었다.

그런데 내 몸은 스트레스라는 폭풍이 지나간 지 한참인데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채 저마다 헛박자를 치고 있었다.

병이란 때로는 처음 시작된 상처보다, 풍파가 다 지나간 뒤에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굳은 자리에서 더 깊어지는 법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낮에 오갔던 그 모순된 대답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 한의사가 지나가듯 꺼냈던 ‘백합병’이라는 말이 이상하리만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책꽂이에서 장중경의 『금궤요략(金匱要略)』을 꺼내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백합호혹음양독병맥증치(百合狐惑陰陽毒病脈證治)」의 첫 문장을 마주했다.

「百合病者,百脈一宗,悉致其病也.」
(백합병(百合病)이라는 것은, 온몸의 모든 맥(百脈)이 하나의 근원(一宗)에서 비롯되어 다 함께 병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은, 낮에 진료실에서 더듬거리며 털어놓았던 하소연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했다.

「意欲食復不能食,常默然,欲臥不能臥,欲行不能行.」
(먹고자 하나 다시 먹지 못하고, 늘 말없이 잠잠하며, 눕고자 하나 눕지 못하고, 걷고자 하나 걷지 못한다.)

내 상태를 단번에 백합병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오래된 조문은 어떤 장기의 고장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내 몸의 처지를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옛 의가들 역시 몸의 기능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지 못하고 헛도는 이 기묘한 단절을 오래 관찰한 끝에, 이를 하나의 독립된 병증으로 기록해 두지 않았을까.

시선이 조문 속 네 글자에 멈추어 섰다.

「身形如和.」
(몸의 겉모습은 평온하고 조화로운 듯하다.)

대기실 거울에 비쳤던 멀쩡한 내 얼굴과, 병원 검사 결과지에 적혀 있던 ‘특이 소견 없음’이라는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고전의 ‘신형여화’와 현대의 ‘정상 수치’는 맥락이 다르겠지만, 두 시선이 가리키는 지점은 같았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나 정지된 단면만으로는 사람이 하루하루 겪어내는 몸의 어긋남을 온전히 읽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몸의 형태는 그대로인데, 먹고 자고 걷고 숨 쉬는 일들이 이상하리만치 서로 어긋나 있었다.

뚜렷하게 망가진 곳은 없다는데, 왜 몸 전체는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이 병증은 전신의 쇠약을 다루는 허로(虛勞)와 무엇이 다른가.

『금궤요략』의 「혈비허로병맥증치(血痺虛勞病脈證幷治)」 편을 들여다보았다.

허로에서는 정(精)·혈(血)·기(氣)가 함께 쇠한다. 생명의 바탕이 되는 정(精), 몸을 적시고 기르는 혈(血), 그 바탕 위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기(氣)가 함께 부족해지며, 여러 부족의 양상이 겹쳐 나타난다.

반면 백합병은 기능이 단순히 멈춰버린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 모순되는 충동과 상태들이 불연속적으로 어긋나며 충돌한다. 먹고 싶은 충동은 치솟는데 입에 넣는 순간 거부감이 들고, 쓰러질 듯 피곤한데, 자리에 눕는 순간 각성이 튀어 오른다.

허로가 생명을 지탱하는 ‘자원의 부족’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백합병은 자원의 부족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여러 기능이 하나의 흐름으로 맞물리지 못한 채 제각각 흩어져 충돌하는, ‘조율의 실패’에 가까운 양상을 띤다.

다시 백합병 조문의 첫 문장을 읽었다.

「百合病者,百脈一宗,悉致其病也.」
(백합병(百合病)이란, 온몸의 백맥(百脈)이 하나의 종(宗)에 함께 이어져 있어 모두가 병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 ‘一宗(일종)’을 두고 역대 의가들은 심장(心)이나 폐(肺), 혹은 가슴속에 모여 폐의 호흡과 심맥의 운행을 돕는 종기(宗氣)를 가리킨다고 저마다 해석을 덧붙여왔다.

어느 해석이 옳은지를 가리는 것보다, 백합병이 심장·폐 가운데 어느 하나의 국소적 이상에만 가둘 수 없는 온몸의 맥이 함께 흔들리는 병증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더 눈에 들어왔다.

第4程에서 살펴보았듯 호흡과 심박, 체온과 자율신경은 저마다 고유한 파동을 그리면서도 서로의 시간을 맞추어 공명한다.

그렇다면 ‘百脈一宗’이란 온몸을 그물망처럼 이어주던 생명의 리듬들이, 서로의 박자를 놓쳐버렸을 때 벌어지는 전신적인 불협화음을 일컬은 것은 아니었을까.

후대 의가들은 백합병의 주요 병기를 흔히 심폐음허(心肺陰虛)·음허내열(陰虛內熱)로 해석해 왔다.

입이 쓰고(口苦), 소변이 붉으며(小便赤), 맥이 가늘면서도 빠르게 뛰는(脈微數) 징후들. 그리고 억지로 땀을 내거나(發汗), 토하게 하거나(吐法), 설사시키는(下法) 식의 거친 치료 끝에 음액(陰液)이 손상되어 병이 깊어지는 경과. 백합(百合)·지모(知母)·지황(地黃)처럼 진액을 보태고 허열을 식히는 약재들이 쓰인 것도 이런 해석과 맞닿아 있다.

여기서 음허는 단순히 심장이나 폐가 ‘말랐다’는 뜻이라기보다, 몸을 적시고 식히며 흥분을 가라앉혀 주는 물질적 바탕이 부족해진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第4程에서 우리는 생명의 리듬을 상태와 상태 사이를 오가는 전환 능력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그 전환 역시 신호와 명령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긴장과 흥분이 오래 이어진 몸이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아오려면, 그 움직임을 받아내고 가라앉혀 줄 바탕이 필요하다. 후대 의가들이 말한 음액의 손상은 바로 그런 바탕이 약해진 상태로도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리듬은 의지만으로 복원되지 않는다.

몸이 제자리로 부드럽게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 움직임을 받아줄 충분한 물질적 여유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회복은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

우리는 흔히 우리를 짓누르던 스트레스 상황이 끝나거나, 검사에서 뚜렷한 이상이 사라지면 몸도 곧 예전 상태로 돌아갈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 몸은 전원을 껐다 켜면 초기 상태로 리셋되는 기계가 아니다.

자극이 사라진 뒤에도 여러 생리계가 곧바로 이전의 균형을 되찾는 것은 아니다. 오래 이어진 긴장과 소모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몸이 다시 안정된 흐름을 찾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눈앞의 원인을 치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소모된 몸을 돌보며 흐트러진 기능들이 다시 안정될 시간을 마련해 주는 일. 회복은 그렇게 몸의 속도를 기다려 주는 데서부터 비롯될지도 모른다.

얼마 후 다시 찾아간 진료실에서, 한의사는 병이 다 나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식사는 좀 어떠세요? 전보다 한 끼 드시는 게 편해졌습니까?”

“조금 걷고 나서 숨이 찰 때는요? 전보다 빨리 가라앉습니까?”

단 몇 번의 치료로 기적처럼 모든 증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미세한 변화가 몸 안쪽에서 움트고 있었다.

점심에는 밥 반 공기를 별다른 불편 없이 넘길 수 있었고, 밤에는 두근거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전보다 수월하게 잠들었다. 산책을 마치고 현관에 들어섰을 때도 곧장 주저앉기보다, 잠시 서서 숨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지켜볼 만한 여유가 생겨 있었다.

회복이란 모든 불편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어긋났던 일상의 흐름이 조금씩 제 리듬을 되찾아 가는 느리고 조용한 과정인지도 몰랐다.


진료실을 나서자, 어스름이 내려앉는 저녁 거리가 펼쳐진다.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걸음으로 스쳐 지나간다.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어본다. 숨이 들고 나며, 심장은 박동하고, 횡격막은 아래위로 부드럽게 움직인다. 내가 일일이 의식하지 않아도, 지휘자 없이 서로의 박자를 주고받으며 이어지는 몸의 무수한 움직임.

생각은 다시 깊은 물음으로 젖어 든다.

내 지시 없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포와 온몸의 흐름을 하나의 온전한 생명으로 묶어내고, 먹고 자고 걷고 숨 쉬는 가장 원초적인 삶의 마디들을 어둠 속에서 묵묵히 조율해 내는 힘.

평소에는 그 존재조차 잊고 살다가, 그 흐름이 어긋나 일상의 리듬이 무너질 때에야 비로소 그 부재를 절실하게 실감하게 되는 이 조용한 질서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전은 폐(肺)에 ‘백(魄)‘을 배속했다.

그것이 단순한 원초적 본능이나 신경 반사를 뜻하는지, 아니면 의식보다 아득히 깊은 곳에서 몸을 하나의 생명으로 꿰어온 더 오래된 질서를 가리키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병이 지나간 몸을 다시 삶의 자리로 데려오는 이 조용한 힘의 흔적을 따라, 나는 비로소 ‘백(魄)’이라는 글자의 문 앞에 조심스레 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