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谷의 따뜻한 생명 읽기

肺 폐로 가는 길 · 제9편

第6.5程. 걸음과 길 사이

기(氣)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溫谷 · · 33분

화면 속 깜빡이는 커서 옆에 숫자 ‘7’이 놓여 있었다.

잠시 바라보다 백스페이스를 눌러 지우고, 망설임 끝에 ‘6.5’를 적어 넣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번 여정은 폐(肺)에 배속된 감정, 곧 슬픔(悲·憂)의 자리로 곧장 향해야 했다. 第6程에서 백(魄)을 ‘생명지능’이라 정의하고 패드를 집어넣던 때만 해도 다음 행선지에 대한 의문은 없었다.

그러나 다음 글의 첫 문장을 적으려던 순간, 무심코 지나쳤던 『영추(靈樞)』 「본신(本神)」의 한 구절이 손을 멈춰 세웠다.

「肺藏氣,氣舍魄.」
(폐(肺)는 기(氣)를 간직하고, 기(氣)는 백(魄)의 거처가 된다.)

가슴 한구석에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지난 여정에서 백(魄)의 궤적을 따라 몸의 생리적·해부학적 흔적을 짚어보았지만, 정작 백(魄)이 깃든다는 ‘거처’, 그 기(氣)에 대해서는 “당장 이 자리에서 섣불리 규정할 수 없다”는 한 줄로 슬쩍 비껴갔기 때문이다. 주인을 안다면서 그가 머무는 집이 무엇으로 지어졌는지 모른다면, 그 앎은 온전할 수 없다.

잡히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붙들고 있는 기(氣)라는 문턱을 대충 넘길 수는 없었다. 앞으로 마주할 오장(五臟)과 오신(五神), 감정과 질병, 삶과 회복의 밑바닥마다 결국 이 물음과 다시 맞닥뜨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기(氣)라는 글자 앞에서 매번 멈춰 서는가.

누구나 아는 말처럼 익숙하게 쓰이지만, 정작 실체에 대한 명확한 합의 없이 신비주의의 껍질에 싸여 온 탓일까. 아니면 물질과 에너지, 생명 현상 전반을 무차별하게 집어삼킨 지나치게 거대한 이름이라 아무것도 또렷하게 지시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섣부른 정의는 진실을 밝히기보다 가리기 십상이다.

책상 앞에서 이어가던 생각을 접고 노트북을 덮었다. 신발끈을 고쳐 매고, 차분한 가을빛이 내려앉은 뒷산 어귀로 걸어 나갔다.


포장된 넓은 진입로가 끝나고, 인적이 드문 흙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발길이 잦은 한가운데만 반들반들하게 다져져 있었고, 양옆으로는 발목 높이의 풀이 비스듬히 누워 경계를 짓고 있었다. 흙 위로 드러난 참나무 뿌리는 거듭 밟힌 자리만 껍질이 닳아 윤이 났고, 사람 발자국 사이로 작은 짐승의 흔적도 희미하게 겹쳐 있었다.

처음부터 이런 모양의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길이 나기 전의 산자락이 백지상태였던 것도 아니다. 빗물이 흘러내린 고랑, 비탈의 경사, 묵직하게 버틴 바위, 덤불의 밀도와 그늘의 자리가 먼저 그곳에 있었다. 산을 오르내리던 사람과 들짐승은 지형이 제시하는 저항과 허용 사이에서, 덜 가파르고 딛기 편한 자리를 골라 걸었을 뿐이다.

무수한 발걸음이 흙을 누르고 풀을 눕히며 흔적을 남겼다. 하나의 자국 위로 또 다른 발길이 포개지면서 흙은 더욱 단단해졌고, 풀이 물러난 자리에는 마침내 ‘오솔길’이라는 하나의 공간적 질서가 들어섰다.

산의 굴곡이 걸음을 유도했고, 걸음은 그 굴곡 위에 길을 새겼다. 길은 미리 완결된 채 주어져 있던 대상도, 생명이 일방적으로 그어 놓은 인공물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움직임과 산의 형세가 서로 맞물리며 대지 위에 남겨 놓은 살아 있는 궤적이다.

조금 더 오르자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오른쪽은 가파른 오르막에 잡풀이 우거져 있었고, 왼쪽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흙이 평평하게 다져져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갈지 판단하기도 전에, 발은 이미 완만한 왼쪽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길이 특정한 방향을 지시한 것은 아니다. 표지판도, 유도선도 없었다. 다만 무수히 앞서간 이들이 남긴 걸음이 쌓여, 한쪽에서는 머뭇거리게 하고 다른 쪽으로는 몸이 자연스레 기울어지게 했을 뿐이다.

과거의 걸음들이 모여 길의 구조를 빚었고, 그렇게 형성된 길은 현재를 걷는 내 몸의 궤적을 조용히 이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태는 작은 발자국 역시 이 길을 미세하게 다지며, 훗날 이곳을 지날 또 다른 존재의 걸음에 흔적을 보탤 것이다.

걸음이 길을 내고, 길은 다시 걸음을 짓는다.

환경은 생명이 스쳐 지나가는 텅 빈 무대가 아니다. 생명의 움직임이 남긴 자국을 고스란히 받아 두었다가, 다음 생명의 움직임 속으로 되돌려 주는 거대한 관계의 그물망이다.

문득 第6程에서 백(魄)을 두고 고심했던 사유가 떠올랐다.

몸은 세계와 부딪치며 겪은 사건들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는다. 상처와 충격, 반복된 리듬과 습관 속에서 몸의 구조는 미세하게 변형되고, 그렇게 달라진 몸은 다음 순간의 세계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맞이한다.

흔적 그 자체가 곧 백(魄)인 것은 아닐 것이다. 백(魄)이란 축적된 흔적을 지닌 몸이 매 순간 세계를 받아들이고 밀어내며, 다시 안정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체화된 생명지능’에 가깝다.

오솔길의 이치도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발걸음이 길의 형상을 바꾸고, 그렇게 굳어진 길은 다시 다음 걸음의 궤적을 바꾼다. 몸과 환경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흔적을 새기며, 그 흔적을 매개로 서로의 움직임을 조율해 나가고 있었다.

길을 따라 골짜기로 내려서자 차가운 물소리가 차올랐다.

바위틈으로 개울이 흐르는 물가에 섰다. 거센 물살이 돌부리에 부딪혀 꺾이는 모퉁이 한쪽에 손바닥만 한 소용돌이 하나가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바람에 날려 온 노란 가랑잎 하나가 그 언저리로 빨려 들어갔다. 잎사귀는 중심을 향해 두어 바퀴쯤 맴돌더니, 이내 아래쪽 여울을 타고 하류로 빠져나갔다.

잎을 돌게 했던 물은 이미 하류로 흘러가 버렸고, 상류에서는 새로운 물이 쉼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소용돌이는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는 형상을 유지한 채 돌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 소용돌이를 바라보았다.

물이 매 순간 통째로 교체되는데, 우리는 왜 저것을 여전히 ‘하나의 소용돌이’라 부르는가.

소용돌이라는 실체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물인가, 물의 움직임인가. 아니면 유속과 바위의 각도, 바닥의 기울기가 마주쳐 빚어낸 ‘관계의 형태’인가.

소용돌이는 물이 고여 있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물이 단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쉼 없이 드나드는 그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만 자신의 형태를 보존할 수 있었다. 소용돌이를 이루는 고정된 물질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 허상인 것도 아니었다. 소용돌이는 낙엽을 끌어당기고, 바닥의 모래를 흩뜨리며, 주변 물길의 흐름을 실제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눈앞의 개울은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고정된 물질 덩어리가 아니면서도, 물질이 끊임없이 교체되는 가운데 일정한 형태와 기능을 유지하는 대상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는가.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우리가 ‘존재’라 부르는 범주 안에는 고정된 물질뿐만 아니라, 물질의 흐름 속에서 지속되는 ‘과정의 패턴’ 또한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시선을 넓히면 이러한 ‘과정의 패턴’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수평선을 가로질러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 역시 그러하다.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 해안에 이른다고 해서 처음의 바닷물이 그대로 이동해 온 것은 아니다. 물 자체는 제자리에서 일렁일 뿐이며, 그 파동이 연쇄적으로 전달되어 파도라는 형상을 유지한 채 밀려온다. 그리고 마침내 바위를 깎고 모래를 밀어 올리며 해안의 지형을 바꾸어 놓는다.

어둠을 밝히는 모닥불의 불꽃 역시 마찬가지다. ‘불꽃’이라는 독립된 붉은 물체가 장작 위를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다. 산소와 연료가 반응하며 열을 방출하는 연소 과정이 특정 공간에서 연이어 일어날 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속되는 하나의 실체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 불꽃은 실제로 물을 끓이고 쇠를 달군다.

독립된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곧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형태는 물질을 떠나 홀로 자립할 수 없지만, 물질들의 관계 속에서 창발한 실재는 다시 그 물질의 흐름을 제약하고 조직하며, 세계에 물리적인 작용을 가하는 힘을 얻는다.


사유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관계 속에서 창발하여 물리적으로 작동하는 모든 대상을 과연 ‘생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소용돌이는 살아 있지 않다. 불꽃 역시 스스로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니다.

소용돌이는 지나가던 개울물의 일부가 지형의 제약을 받아 잠시 특정 형상을 이루었다가 빠져나갈 뿐이다. 불꽃 또한 장작의 연료와 공기 중의 산소가 만나는 자리에서 지속적인 연소 반응일 따름이다. 둘 다 자신을 구성하는 물질을 스스로 합성하지 못하며, 자신과 외부 세계를 가르는 경계조차 스스로 구축하지 못한다.

생명은 외부에서 주어진 흐름 속에서 잠시 형상을 유지하는 소용돌이와는 다르다.

생명체는 자신의 구성 성분을 끊임없이 새로 생산하고 교체한다. 안과 밖을 구획하면서도 서로를 잇는 ‘경계’를 스스로 축조하고 쉼 없이 보수한다. 그 경계를 통해 필요한 물질과 신호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불필요하거나 유해한 것은 배제한다. 외부 환경이 요동쳐도 내부의 균형을 유지하며, 변화된 조건에 맞추어 다음 반응의 역치와 작동 방식 자체를 재조정해 나간다.

그렇다면 단순한 물리적 자기조직화의 산물과 엔트로피 증가라는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며 작동하는 생명체를 가르는 결정적인 문턱은 어디에 있는가.

그 문턱은 결국, 생명이란 자신의 흐름이 지속될 수 있는 물리적 조건과 ‘경계’ 그 자체마저 스스로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사실에 닿아 있다.

물가에서 허리를 펴고 차가운 산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서늘한 기운이 코와 후두를 지나 기관지를 타고 폐 깊은 곳으로 내려앉았다. 흉곽 안쪽에서 일어나는 숨의 궤적을 가만히 짚어보았다.

기관지는 나뭇가지처럼 갈라지고 가늘어지며 마침내 수억 개의 폐포(肺胞)에 가닿는다. 폐포에 도달한 공기는 몸 깊숙한 곳에 이르렀으나, 엄밀히 말해 아직 몸 내부로 진입한 것은 아니다. 코와 기도를 통해 바깥 대기와 단절 없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도넛의 구멍처럼, 외부 세계가 심장 곁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형국이다.

바깥의 공기와 몸 안의 혈액은 채 1마이크로미터도 되지 않는 ‘공기-혈액 장벽(air-blood barrier)’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이 극도로 얇은 경계면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쉼 없이 교환되고, 공기와 함께 들어온 미세 입자와 미생물을 선별하는 면역의 감시가 작동한다.

이 무수한 폐포를 평평하게 펼쳐 놓는다면 그 넓이는 얼마나 될까?

형태계측학적 연구에 따르면 건강한 성인의 폐포 총 표면적은 약 130~140제곱미터에 달한다 [1]. 테니스 코트 복식 경기장(약 260.8제곱미터)의 절반에 이르는 넓이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실로 ‘테니스장 반만 한 크기의 바깥 세계’가 촘촘히 접힌 채 들어앉아 조용히 숨을 쉬고 있는 셈이다.

흔히 허파를 흉곽 안에 놓인 한 쌍의 닫힌 장기 정도로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생리학의 관점에서 허파는,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거대한 지구의 대기와 매 순간 맞닿기 위해 테니스장 절반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을 좁은 흉강 속에 정교하게 접어 넣은, 거대한 ‘접촉의 계면(界面)’이다.

인간이라는 유기체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 단위, 곧 하나의 ‘세포’로 상정해 본다.

세포에는 안과 밖을 구획하고 내부 환경을 보호하는 세포막(cell membrane)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거대한 유기체 단위 역시 세포막처럼 세계와 맞닿으며 안팎을 가르는 경계 구조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몸의 겉면을 둘러싼 피부(皮膚)는 물리적 충격과 건조함으로부터 내부를 보호하는 일차적인 외벽이다. 그러나 단순한 차단만으로는 생명의 유지가 성립할 수 없다. 외부를 닫아걸기만 하는 막은 벽에 불과하다. 유기체는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대기와 기체를 교환해야 하지만, 1.5~2제곱미터 남짓한 체표면적만으로는 온몸의 세포가 요구하는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하여 생명은 외부와 접촉하는 표면을 몸 안쪽으로 깊숙이 함입(嵌入)시켜 수없이 분지하고 접어 넣음으로써, 가슴 깊은 곳에 거대한 내적 표면을 구축했다.

그것이 바로 폐포다.

피부가 유기체의 ‘외부를 감싸는 경계’라면, 폐포는 환경과의 교환 면적을 극대화하려고 ‘내부로 접혀 들어간, 또 하나의 경계’다.

고전에서 폐(肺)를 논할 때 피부와 털을 묶어 ‘폐주피모(肺主皮毛)’라 일컬었던 오래된 관찰을, 바로 이 경계와 계면(界面)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해부학적 허파가 피부 조직을 신경학적으로 일일이 통제한다는 기계적 인과율로 설명하는 서술이 아니다. 오히려 폐(肺)와 피모(皮毛)를, 한 생명체가 외부 세계와 맞닿으며 안과 밖을 조율하는 ‘하나의 거대한 표면 시스템’으로 꿰뚫어본 통찰이었는지도 모른다[2].

세포막이 세포를 성립시키듯이, 피부와 폐포라는 경계 역시 생명을 지탱하는 세 가지 핵심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안과 밖을 구획하여 주변 환경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생명 단위’를 확립한다.

둘째, 닫힌 벽으로 고립되지 않고, 필요한 기체와 물질을 선별해 통과시키는 ‘선택적 교환’을 관장한다.

셋째, 외부에서 유입되는 자극과 이물질을 판별하여 필요한 반응만을 이끌어내는 ‘식별과 조절’의 관문으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 얇은 막을 단순한 물리적 차단벽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생명의 경계’로 기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第3程의 순례길에서 짚어보았던 경계의 다섯 가지 역동이 떠올랐다.

경계는 무엇이 유입되는지를 가려내고(식별), 무해한 타자를 수용하며(관용), 위험에 직면하면 방어하고(반응), 싸움이 끝날 때를 알아 스스로 멈추고(종료), 흔적을 품은 채 새로운 평형으로 복귀한다(회복).

경계는 피부나 폐포 표면에 고정된 정적인 선이 아니다. 외부와의 끊임없는 침투와 교섭 속에서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 다섯 가지 역동이 쉼 없이 교차하는 ‘관계의 장(場)’이다.

몸이라는 실체가 먼저 완성된 뒤 그 둘레에 껍질처럼 경계가 덧씌워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외부를 가려내고 받아들이고 밀어내며, 다시 안정으로 돌아오는 경계의 역동이 매 순간 지속되기에, 비로소 ‘몸’이라는 질서가 해체되지 않고 생명으로서 유지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사유는 칠레의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와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가 제창한 ‘자기생산(Autopoiesis)’의 개념에 도달한다 [3].

1970년대에 그들이 던진 물음은 생명과 기계를 동일시하던 오랜 통념을 뒤흔들었다.

생명이란 외부에서 입력된 정보에 따라 부품을 조립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인가? 그들의 답은 명백히 ‘아니다’였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외부에서 완제품 형태로 공급된 껍질 속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세포 내부의 대사 반응망은 세포막을 이루는 분자들을 끊임없이 합성해 내고, 그렇게 축조된 세포막은 다시 대사 반응망이 흩어지지 않도록 물리적 공간을 한정한다.

생명의 작용이 경계를 낳고, 그 경계가 다시 생명의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막(경계)은 생명 활동이 빚어낸 ‘산물’인 동시에, 그 활동이 다음 순간에도 지속될 수 있도록 지탱하는 ‘물리적 전제’다.

원인과 결과가 서로를 산출하며 스스로를 지속시키는 자기참조적 순환. 이것이 바로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포착한 생명의 자율성이며, ‘자기생산’의 본질이다.

개울가의 소용돌이는 자신을 통과하는 물도, 자신을 한정하는 지형의 경계도 스스로 생산하지 못한다.

반면 생명은 자신의 흐름을 담아낼 그릇 자체를 스스로 주조하며, 그 용기(容器)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한다.

경계는 생명의 외부에 둘러쳐진 수동적인 껍질이 아니다. 유기체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매 순간 물질과 에너지를 재편해 나가는 ‘자기생산의 최전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계를 지닌 생명체에게 ‘세계’란 과연 무엇인가.

산길에서 마주했던 갈림길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 갈림길은 뇌 속에 저장된 건조한 지리 정보가 아니었다. 다리 근육의 긴장도, 허리의 피로감, 심장의 박동, 그리고 과거에 미끄러졌던 기억의 흔적이 한데 얽혀, 완만한 왼쪽 길을 ‘몸이 안전하게 수용할 수 있는 통로’로 드러내 준 것이었다.

바렐라와 에반 톰슨(Evan Thompson)이 규정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와 ‘구조적 결합(Structural Coupling)’의 개념이 바로 여기에 닿아 있다[4].

생명에게 세계란 외부에 객관적으로 완결된 채 주어져 있고, 뇌가 그것을 거울처럼 그대로 복사하는 정보의 집합이 아니다.

유기체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 구조와 반응 방식을 부단히 갱신하며, 그렇게 변형된 몸을 매개로 비로소 세계를 특정한 의미로 경험한다. 바렐라가 제창한 ‘행화(enaction)’는 이처럼 생명과 환경의 관계 속에서 몸과 세계가 동시에 출현하고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을 가리킨다.

유기체는 환경에 일방적으로 순응하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도, 환경을 임의로 조작하는 주체도 아니다.

걸음이 길을 내고 길이 다시 걸음을 이끌듯, 생명의 활동은 환경에 구조적 흔적을 남기고, 그렇게 변형된 환경은 다음 순간 생명의 생리적 상태와 행위를 제약하고 유도한다. 몸과 환경은 서로의 상태를 끊임없이 변형시키며 역사성을 함께 축적해 가는 공진화(共進化)의 관계에 놓여 있다.

사유가 여기에 이르자, 폐포와 피부라는 경계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안과 밖을 차단하는 닫힌 벽이 아니라, 유기체와 세계가 서로를 규정하고 산출하며 맞물려 돌아가는 광활한 ‘상호작용의 장(場)’이었다.

이 역동적인 상호작용의 역사는 결코 최근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第2程의 갯바위에서 마주했던 생명사의 아득한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40억 년 전, 원시 바다에서 최초로 지질막을 형성하며 출현한 단세포 유기체로부터, 대기 중 산소 농도의 증가에 적응해 육상으로 진출하고 허파를 발달시킨 척추동물에 이르기까지, 생명은 단 한 순간도 환경과의 결합을 단절한 적이 없다.

지금 들이마시는 한 번의 차가운 호흡 속에는, 40억 년에 걸쳐 기후 변동과 중력, 산소의 독성과 포식자의 위협 속에서 유기체들이 벼려낸 경계의 메커니즘, 면역학적 식별, 그리고 폐포 장벽의 정교한 구조가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40억 년의 진화사 속에서 변함없이 지속되어 온 것은 고정된 물질 덩어리가 아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생명체를 구성했던 탄소와 수소, 질소와 산소는 무수히 흩어져 흙과 바다, 대기 속으로 환원되었다.

진정으로 보존되어 온 것은 환경과의 경계를 짓고, 물질을 교환하며, 와해(瓦解)의 위기 속에서도 스스로 질서를 재조직해 온 ‘관계의 방식’이다.

물질이 끊임없이 교체되는 와중에도 작동을 멈추지 않았던, 유연하고 집요한 생명의 동적 패턴이었던 것이다.

사유를 잠시 멈추고, 지금까지 도달한 현대적 개념의 지형을 정리해 본다.

첫째, 생명은 고정된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물질을 끊임없이 흡수하고 배출하는 열린 ‘과정(process)’이다.

둘째, 그 과정 속에는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를 스스로 구축하고 보수하는 ‘자기생산적 자율성’이 작동한다.

셋째, 그 경계는 단순한 차단벽이 아니라, 물질과 정보를 선택적으로 교환하고 조율하는 ‘소통의 계면(interface)’이다.

넷째, 몸과 환경은 서로에게 지속적으로 흔적을 남기며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 ‘구조적 결합’의 관계에 놓여 있다.

다섯째, 이 관계망 속에서 창발한 전체의 질서는 개별 부분의 단순한 합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다시 하위 요소들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조직하는 고유한 작용력을 지닌다.

이 다섯 가지 명제는 시스템 생물학과 인지과학이 포착한 생명의 현대적 단면이다.

오래전부터 바렐라의 이론 체계로 동양의 기(氣) 개념을 해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어 왔다. 자기생산과 구조적 결합, 체화된 인지라는 개념들이라면, 모호함에 싸여 있던 기(氣)라는 오래된 글자의 실체에 논리적으로 가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기대가 성급한 유비(analogy)의 오류일지, 새로운 인식의 통로일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의 논의가 기(氣) 자체를 직접 규명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사유는 단지 고정된 물질이 아니더라도 엄연히 실재하며 작동하는 ‘생명의 동적 질서’를 현대 학문의 언어로 사유할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 주었을 뿐이다.

이제 이 징검다리를 딛고, 고전이 기(氣)라 명명했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시 출발점으로 수렴한다.

아득한 과거, 고전을 남긴 옛 의가(醫家)들이 생명이라는 유기적 질서와 마주하며 남겨 놓았던 저 한 글자,

‘기(氣)’는 과연 무엇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일까.


양지바른 산마루의 너른 바위에 걸터앉아 가방 속에서 패드를 꺼냈다.

고전에서 기(氣)를 다룰 때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오류는, 그것을 특정한 현대적 개념 하나로 무리하게 치환해 버리는 태도다.

전통 의학 문헌에서 기(氣)는 결코 단일한 의미로 고정되어 쓰이지 않는다. 문맥에 따라 지시하는 지평과 층위가 매번 달라진다.

기후와 계절의 변화, 바람과 추위, 안개와 이슬을 가리킬 때 기(氣)는 ‘환경과 자연의 조건’을 뜻한다.

몸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 활동 전반을 포괄할 때 기(氣)는 정(精)·혈(血)·진액(津液)을 아우르는 ‘생명 현상의 총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반면 정(精)이나 혈(血)과 대대(對待)를 이루며 나란히 쓰일 때의 기(氣)는, 상대적으로 고정된 물질적 형체에 비해 부단히 움직이고, 온기를 공급하며, 변화를 추동하는 ‘기능적·동역학적 성격’으로 수렴된다.

또한 곡기(穀氣), 영기(營氣), 위기(衛氣), 종기(宗氣), 폐기(肺氣), 신기(腎氣)처럼 수식어가 붙을 때의 기(氣)는 그 발생 근원, 순환의 경로, 생리적 역할, 관여하는 장부에 따라 저마다 다른 국면을 드러낸다.

원전의 한 대목은 성급한 도식화를 단숨에 무너뜨린다.

『영추(靈樞)』 「자절진사(刺節眞邪)」 편의 문장이다.

「正氣者,正風也.」
(정기(正氣)란 바른 바람(正風)이다.)

만약 기(氣)를 언제 어디서나 ‘몸 내부의 생명 에너지’나 ‘생체 전기 신호’ 따위로 협소하게 규정해 버린다면, 몸 밖의 순조로운 기후와 바람을 두고 ‘정기(正氣)’라 명명한 원전의 문장은 설 자리를 잃는다.

동일한 글자가 쓰였다고 해서 언제나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의 기(氣)를 왜곡 없이 독해하기 위해서는, 그 용어가 생태계 전체를 조망하는 총칭(總稱)인지, 몸 안의 특정 기능을 지칭하는 분칭(分稱)인지, 아니면 유기체를 둘러싼 환경적 조건을 가리키는지 그 층위를 엄격하게 분별해야 한다.

이러한 범주적 구분을 명료하게 보여 주는 문답이 『영추』 「결기(決氣)」 편에 수록되어 있다.

황제(黃帝)가 묻는다.

“인체에 정(精), 기(氣), 진(津), 액(液), 혈(血), 맥(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본래 이는 하나의 기(一氣)일 터인데, 어찌하여 여섯 가지 이름으로 나누어 부르는 것입니까?”

이에 기백(岐伯)은 정(精)에서 맥(脈)에 이르는 여섯 요소의 생리적 형상과 작용을 각각 설명한 뒤, 마지막에 이르러 이들을 다시 묶어 ‘여섯 기(六氣)’라 칭한다.

모든 생명 현상이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일원론적 직관과, 실제 몸 안에서 분화되어 작동하는 생리적 구별이 교차하는 대목이다. 이를 두고 명나라의 의학자 장개빈(張介賓)은 『유경(類經)』에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前言一氣,總言之也;此言六氣,分言之也.」
(앞서 ‘하나의 기’라 한 것은 전체를 포괄하여 말한 것(總言)이고, 여기서 ‘여섯 기’라 한 것은 국면을 나누어 말한 것(分言)이다.)

‘총언(總言)’과 ‘분언(分言)’.

기(氣)는 유기체 전체의 생명 질서를 포괄하는 거시적 명칭이기도 했으며, 그 체계 내부에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분화되어 작동하는 구체적 상태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고전의 관찰자들은 유기체 전체의 통일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 체계 안에서 서로 다른 성질과 기능이 분화되어 드러나는 양상을 치밀하게 주시했다.

이분법적 범주에 익숙한 현대인은 흔히 묻는다.

“기(氣)는 물질인가, 아니면 에너지나 기능인가.”

그러나 문헌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질문 자체가 생명을 바라보던 고대의 존재론적 시선과 어긋나 있음을 알게 된다.

『영추』 「결기」 편의 서술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中焦受氣,取汁變化而赤,是謂血.」
(중초(中焦)가 음식의 기(氣)를 받아, 그 즙을 취해 변화시켜 붉게 만든 것을 혈(血)이라 한다.)

「上焦開發,宣五穀味,熏膚充身,澤毛若霧露之漑,是謂氣.」
(상초(上焦)가 열리고 펼쳐져 오곡의 정미(精微)를 널리 퍼뜨리고, 피부를 훈증하며 몸을 채우고 털을 윤택하게 하기를 안개와 이슬이 대지를 적시듯 하는 것, 이를 기(氣)라 한다.)

여기서 기(氣)는 음식에서 얻은 영양이라는 물질적 바탕을 결코 떠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고정된 덩어리로 굳어 있지 않으며, 전신으로 확산되어 조직을 덥히고 적시는 역동적인 ‘펼침과 침윤의 과정’ 그 자체로 묘사된다.

나아가 『소문(素問)』 「거통론(擧痛論)」에 이르면 기(氣)의 동역학적 방향성은 더욱 선명해진다.

「怒則氣上,恐則氣下,思則氣結…… 」
(분노하면 기(氣)가 치밀어 오르고, 공포에 질리면 기(氣)가 내려앉으며, 깊은 생각에 빠지면 기(氣)가 뭉친다……)

기(氣)는 실체 없는 추상적 관념도 아니며, 따로 떼어내 무게를 달 수 있는 고정된 입자도 아니다.

물질적 바탕에 뿌리를 두면서도 결코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출입(出入)하고 승강(昇降)하며 몸 전체의 질서를 직조해 내는 생명의 동적 과정.

그것이 바로 고전이 기(氣)라는 한 글자 속에 담아내려 했던 생명의 실상이었다.

이제 논의는 가장 핵심적인 물음의 문턱에 도달했다.

몸 안의 오장육부 어디에나 기(氣)가 존재한다.

간(肝)에는 간기(肝氣)가, 비(脾)에는 비기(脾氣)가, 심(心)에는 심기(心氣)가, 신(腎)에는 신기(腎氣)가 작동한다. 『영추』 「본신」 편 역시 오장 각각의 기가 허(虛)하거나 실(實)할 때 나타나는 병리적 징후들을 낱낱이 열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전의 관찰자들은 어째서 유독 폐(肺)를 지목하여 다음과 같은 선언들을 거듭 남겨 놓았을까.

「肺藏氣,氣舍魄.」 (『영추』 「본신」)
(폐(肺)는 기(氣)를 간직하고, 기(氣)는 백(魄)의 거처가 된다.)

「肺者,氣之本,魄之處也.」 (『소문』 「육절장상론(六節藏象論)」)
(폐(肺)는 기(氣)의 근본이요, 백(魄)이 머무는 곳이다.)

「諸氣者,皆屬於肺.」 (『소문』 「오장생성(五藏生成)」)
(몸 안의 모든 기(諸氣)는 모두 폐(肺)에 속한다.)

모든 장부가 저마다의 고유한 기를 운용하고 있음에도, 어째서 폐만이 ‘기의 근본(氣之本)’이라 불리며 전신의 기가 총괄되는 자리로 지목되었는가.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흔히 두 가지 손쉬운 극단으로 도피하곤 한다.

하나는 폐(肺)를 현대 해부학의 허파로 축소하여 ‘산소를 들이마시니 기를 주관한다’는 식의 단순한 가스 교환으로 환원해 버리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이를 실증적 근거가 없는 ‘고대의 상징적 도식’으로 치부하며 사유를 중단해 버리는 태도다.

그러나 문헌의 맥락을 찬찬히 짚어보면, 폐(肺)에 부여된 위상은 단순한 호흡 작용에 머물지 않는다.

『소문』 「육절장상론」은 폐(肺)를 ‘기(氣)의 근본’이라 규정한 직후, 그 윤택함이 털에 나타나고 충만함이 피부에 머문다고 덧붙인다.

『영추』 「본장(本藏)」은 면역과 체온 조절을 담당하는 위기(衛氣)가 피부와 주리(腠理), 땀구멍의 개폐 기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명시한다.

나아가 『소문』 「경맥별론(經脈別論)」은 소화기계(脾)에서 올라온 정미로운 물질이 폐로 집결하고, 폐(肺)의 선발(宣發)·산파(散播) 작용을 통해 수액의 통로가 조절되어 하부(膀胱)로 이어지는 전신적 순환을 서술한다.

이 모든 기록을 단순히 공기를 흡입하는 해부학적 장기 하나의 기능으로만 좁혀 읽을 수는 없다. 전통 의학의 폐(肺)는 외기를 수용하는 기계적 호흡에 그치지 않고, 유기체가 외부 환경과 관계를 맺고 물질을 교환하는 경계 작용 전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전이 말한 폐(肺)는 해부학적 장기의 물리적 테두리를 넘어, ‘생명과 환경이 교섭하는 경계 시스템 전체를 총괄하는 최상위의 장상(臟象)’으로 규정하는 것이 온당하다.

이러한 규정은 자의적인 비약이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폐포는 몸 내부로 접혀 들어간 피부이며, 피부는 몸 외부로 확장된 폐포다. 그리고 그 얇은 막 위에서 식별·관용·반응·종료·회복이라는 다섯 가지 역동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교차하고 있다.

이로써 앞선 사유의 파편들이 하나의 구조로 맞물린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외부 환경과 구별되는 자율적 경계를 구축하고, 그 경계를 통해 쉼 없이 물질과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외부의 끊임없는 자극 속에서도 자기 질서를 재조직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 몸에서 생명과 환경의 이 광활한 상호작용이 단 일 초도 멈추지 않고 펼쳐지는 자리가 바로 테니스장 절반에 달하는 내적 표면인 폐포(肺胞)와, 외부 자극을 온몸으로 방어하는 피부(皮膚)다.

호흡은 생명이 환경과 맺는 이 거대한 교환의 역동이 가장 직접적이고 긴박한 형태로 드러나는 대표적 사건이다. 숨이 멎는다는 것은 단순한 가스 공급의 중단을 넘어, 생명과 세계를 이어주던 가장 긴밀한 ‘경계의 출입(出入)’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고전의 선언을 다시 읽는다.

‘모든 기가 폐에 속한다(諸氣皆屬於肺)’는 언명은, 해부학적 허파가 온몸의 기(氣)를 독점적으로 생산하여 각 장기에 배급한다는 기계론적 분배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이 환경과 맞닿으며 경계를 구축하고, 외부를 수용하여 내부를 채우며, 몸 전체를 하나의 동적 질서로 유지해 나가는 보편적 작동성이 폐(肺)라는 경계의 장상(臟象)을 통해 가장 뚜렷하게 발현되기 때문에 내려진 배속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작동성’이라는 개념은 엄밀한 구별을 요한다. 이는 완결된 단일 사건으로서의 작동(operation)도, 실현을 기다리는 잠재적 작동 가능성(operability)도 아니다. 굳이 개념화하자면 그것은 ‘오페러티비티(operativity)’, 즉 지금 이 순간에도 유기체가 실제로 질서를 유지하며 작동하고 있는 ‘진행형의 동적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한다.

물론 이것이 고대 텍스트의 원의(原義)를 온전히 복원한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수천 년 전의 직관과 현대 시스템 생명관의 통찰을 하나의 일관된 논리로 엮어 내기 위해, 이 여정 위에서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해석학적 가설’이다.

이 가설을 토대로 전체로서의 기(氣)와 각 장부의 개별적 기(氣)가 맺는 관계의 층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상위의 ‘전체로서의 기(氣)’는, 생명체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체내의 모든 물리·화학적 과정을 통합하여 몸을 지속하고 갱신해 나가는 ‘통합된 동적 작동성(operativity)’을 가리킨다.

그리고 ‘폐주기(肺主氣)’는 이 전신적인 생명의 작동성을 ‘환경과의 경계를 형성하고 조율하는 관점’에서 총괄하는 관계론적 이름이다.

이 보편적 작동성이 폐(肺)의 고유한 생리적 영역에서 기체를 교환하고, 피부와 주리를 조율하며, 체표를 방어하고, 진액을 선발(宣發)·숙강(肅降)하는 구체적 양상으로 발현될 때, 우리는 그것을 ‘폐기(肺氣)’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생명의 동적 작동성이 방향성을 개척하고 전개하는 운동성으로 특화될 때 그것은 ‘간기(肝氣)’가 되며, 외부에서 유입된 물질을 체내 질서로 전환하는 대사적 변환으로 특화될 때는 ‘비기(脾氣)’가 된다. 나아가 수십억 년 진화사의 역사성과 선천적 잠재력을 품은 근원적 동력으로 기능할 때, 그것은 ‘신기(腎氣)’이자 ‘원기(元氣)’로 명명된다[5].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최상위의 기(氣)에서 각 장부의 기(氣)로 내려가는 이러한 하향식 서술은,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 채택한 ‘개념적 분석의 순서’일 뿐이다.

실제 살아 숨 쉬는 생명체 내부에서 폐(肺)가 먼저 완성된 거대한 기(氣)를 만들어 낸 뒤 이를 각 장부에 차례로 나누어 주는 시간적 선후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몸 안에서 전체와 부분은 상호 순환적으로 서로를 성립시킨다.

간(肝)의 전개, 심(心)의 통합, 비(脾)의 변환, 폐(肺)의 경계 조율, 신(腎)의 저장이라는 각 장부의 고유한 작동성(operativity)들이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의 회로로 맞물려 상호 지탱할 때, 비로소 전체로서의 ‘생명의 동적 작동성’이 창발한다.

그리고 그렇게 창발한 전체의 상태는 다시 개별 장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내부 환경을 형성하고 하향적으로 제약한다.

부분이 전체를 산출하고, 전체는 다시 부분을 조직한다.

물방울의 미시적 운동이 거시적인 소용돌이라는 형태를 낳고, 그렇게 형성된 소용돌이가 다시 개별 물방울의 궤적을 규정하듯, 유기체 안에서 전체와 부분은 끊임없이 서로를 지탱하며 재생산하는 순환적 인과성 속에 놓여 있다.

이 동역학적 작동성의 장(場)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지난 第6程의 주제였던 백(魄)과 다시 조우한다.

「氣舍魄.」
(기(氣)는 백(魄)의 거처가 된다.)

생명체가 환경과 교섭하며 물질대사를 하고, 심장을 박동시키며, 혈류를 순환시키고, 근육을 수축시키는 모든 구체적인 몸 활동의 총체, 즉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생명의 통합된 작동성’ 그 자체를 우리는 기(氣)라 부른다.

그리고 그 동적 흐름 속에서, 축적된 몸 상태와 생물학적 역치에 따라 무엇을 수용하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를 판별하며, 반응의 개시와 종료, 평형으로의 복귀를 조율하는 ‘체화된 생명지능’을 우리는 백(魄)이라 명명한다.

기(氣)가 없다면 백(魄)은 자신을 구현할 물리적·신체적 작용을 상실한다. 반면 백(魄)이 없다면 기(氣)의 흐름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세밀하게 조율되는 유기적 질서를 잃게 된다. 기(氣)는 백(魄)이 작동하는 물리적 장(場)이며, 백(魄)은 그 장 안에서 몸과 세계의 교섭을 조율하는 내재적 지능이다.

패드 화면 속의 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을 멈추었다.

사유가 감상에 휩쓸리면 정의는 독단으로 흐르기 쉽다. 새로운 규정을 내놓기 전에, 지금까지의 논증이 어디까지가 명확히 입증된 관찰이며 어디부터가 가설의 영역인지를 학문적으로 엄정하게 구분해 둘 필요가 있다.

이 논증은 크게 두 층위로 구성된다.

첫째는 임상과 이론을 매개하는 유용한 ‘해석 모형’의 수립이다.

생명과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몸 내부의 무수한 물질적 과정들이 맞물려 운동·교환·적응·변화를 이루어 내는 통합된 양태를 ‘생명의 동적 작동성(operativity)’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 모형은 막연한 관념의 영역에 머물던 기(氣)의 담론을 구체적인 생리적·병리적 관찰의 언어로 복원한다.

임상에서 환자의 기(氣)를 파악한다는 것은 비가시적인 초자연적 기운을 직관하는 행위가 아니다. 몸 내부의 다양한 생리적 기능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반응의 방향성이 어느 한쪽으로 편중되거나 울체(鬱滯)되지 않았는지, 자극에 대한 반응의 강도와 지속성이 상황에 부합하는지, 전환과 종료의 타이밍이 적절한지, 그리고 요동 이후 새로운 평형으로의 회복이 지체되지 않는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이다. 즉, 구체적인 ‘생명의 작동 양태’를 엄밀하게 관찰하고 조율하는 작업이다.

둘째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존재론적 가설’이다.

이렇게 조직된 생명의 통합적 작동성은 개별 분자나 세포들의 기계적 총합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인 지속성과 방향성을 지닌다. 나아가 자신을 구성하는 하위 물리·화학적 과정들의 거동을 역으로 규정하고 조직하는 인과적 작용력을 발휘한다. 이것이 바로 ‘창발적 실재(Emergent Reality)’라는 가설이다.

개울의 소용돌이가 개별 물 분자의 단순한 합을 넘어 실재하는 물리적 힘을 행사하고, 해안을 때리는 파도가 지형을 변형시키듯, 생명의 통합된 작동성 역시 물질적 과정에서 창발하여 다시 그 물질의 흐름을 통제하는 자연의 엄연한 실재다.

바렐라의 자기생산과 체화된 인지 이론은, 이러한 가설이 신비주의적 추측으로 퇴행하지 않고 현대 복잡계 과학과 시스템 철학의 엄밀한 언어로 타당성을 검증받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중요한 학문적 디딤돌이 되어 준다.

산마루를 훑고 지나가는 늦은 오후의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오솔길에서 출발하여 개울의 소용돌이와 파도, 140제곱미터에 달하는 폐포의 계면, 바렐라의 자기생산과 고전의 문헌들을 가로질러 온 사유의 끝에서, 마침내 기(氣)라는 이름에 대한 규정을 패드 화면 위에 적어 내려간다.

"기(氣)는 생명의 동적 작동성이다."
(Qi is the dynamic operativity of life.)

이를 확장해서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기(氣)는 생명체가 지닌 물질·구조·정보·가능성을 실제 운동·교환·기능과 변화로 현실화하고, 그 변화를 몸의 다른 곳과 다음 순간으로 이어가는 생명의 동적 작동성이다."
(Qi refers to the dynamic operativity of a living system—the process that actualizes its matter, structure, information, and latent capacity into movement, exchange, function, and transformation, seamlessly carrying those changes across the body and into the next moment.)

"기(氣)는 수많은 물질적 생리 과정이 자기조직화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작동할 때 창발하는, 인과적 효력을 가진 동적 실재이다."
(Qi is a dynamic reality with causal efficacy, emerging when numerous physical and physiological processes self-organize to operate as a unified living being.)

이를 가장 직관적인 언어로 압축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기(氣)는 작동 중인 생명이다."
(Qi is life in operation.)

이 명제들은 고전 문헌에 등장하는 다층적인 기(氣)를 단 하나의 뜻으로 일괄 치환하려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옛 관찰자들이 남겨 놓은 장상(臟象)의 통찰과 폐(肺)의 배속 체계를, 현대 시스템 생명관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해 보려는 잠정적인 해석학적 시도다.

이 시도의 정당성은 전통 주석의 권위에 기대는 데 있지 않다. 이 가설의 유효성과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앞으로 이어질 장부(臟腑)의 여정에서, 그리고 임상과 학문의 현장에서 각자의 경험과 연구를 통해 함께 검증되고 다듬어질 몫으로 남겨 둔다.


바위에서 일어나 패드를 가방 깊숙이 넣고 천천히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올라올 때 디뎠던 오솔길을 그대로 되짚어 내려갔지만, 눈앞의 길은 더 이상 조금 전의 그 길이 아니었다. 발걸음이 닿았던 자리마다 흙은 미세하게 더 다져졌고, 붉게 기운 노을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길 위의 명암을 바꾸어 놓았다.

개울가 돌 틈의 소용돌이는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으나, 그 형상을 짓고 허무는 물줄기는 이미 단 한 방울도 이전의 물이 아니었다.

길을 따라 내려가는 내 몸 역시 산을 오르기 전의 몸이 아니었다.

다리 근육에는 오르막을 버텨낸 피로가 배어 있었고, 서늘한 산 공기를 거듭 들이마신 흉곽은 한결 깊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달라진 몸의 감각이 하산하는 발걸음의 리듬을 새롭게 조율하고 있었다.

나는 길을 걸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길 또한 내 걸음의 속도와 궤적을 빚어내고 있었다. 내가 남긴 자국은 산길의 역사가 되었고, 산길이 남긴 자극과 피로는 앞으로 살아갈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생명은 환경이라는 외부와 단 한 순간도 분리되어 존재한 적이 없다. 들숨과 날숨의 매 순간마다, 발을 딛고 밀어내는 매 걸음마다, 우리는 세계와 경계를 맞대며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기(氣)의 흐름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산비탈을 벗어나자, 도시는 이미 어스름 속에 잠겨 불빛을 하나둘 밝히고 있었다.

산을 오르기 전 미뤄 두었던 숫자 ‘7’이 다시 떠올랐다. 第6.5程의 우회를 거쳐, 이제 다음 행선지로 넘어갈 차례였다.

기(氣)가 생명과 환경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동적 작동의 총체라면, 그리고 백(魄)이 그 속에 깃든 체화된 생명지능이라면, 상실의 순간 마주하는 깊은 슬픔(悲·憂)은 이 근원적인 생명의 작동성을 어떻게 뒤흔드는가.

시선은 저 아래 도시 어딘가, 누군가가 상실을 마주하고 있을 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1] 성인 폐포의 총 표면적에 대해서는 형태계측학적 연구마다 측정 방식과 폐의 팽창 상태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고전적인 Gehr 등의 연구(Gehr P, Bachofen M, Weibel ER. The normal human lung: ultrastructure and morphometric estimation of diffusion capacity. Respir Physiol. 1978) 이래로 Knudsen과 Ochs의 개괄(Knudsen L, Ochs M. The micromechanics of lung alveoli: structure and function of surfactant and tissue components. Histochem Cell Biol. 2018)에 이르기까지 130~140m² 안팎이 표준적인 참조치로 널리 인용된다. 국제테니스연맹(ITF) 규정에 따른 복식 테니스 코트 자체의 규격은 23.77m × 10.97m(약 260.8m²)이므로, 폐포의 표면적은 코트 전체 면적의 약 절반에 상당한다.

[2] 위장관(소화관)의 점막 표면 역시 음식물이라는 외부 물질을 받아들이는 거대한 체내 경계를 형성한다. 현대 생리학에서 소화관 점막의 표면적은 주름과 융모를 포함하여 평균 32m² 안팎으로 재평가되고 있다(Helander HF, Fändriks L. 2014). 향후 脾(비)의 순례에서 살펴보겠지만, 고전의학에서 手太陰肺(수태음폐)와 足太陰脾(족태음비)가 모두 ‘太陰(태음)’이라는 동일한 위상을 부여받은 까닭은, 외부 세계를 몸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여 생명의 질서로 탈바꿈시키는 이 두 거대한 ‘체내 경계 시스템’의 상통성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3] Varela FG, Maturana HR, Uribe R. Autopoiesis: The Organization of Living Systems, Its Characterization and a Model. BioSystems. 1974;5(4):187–196. 저자들은 세포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물질 대사망을 생산하고, 그 대사망이 다시 물리적 경계(막)를 생성하는 순환적 자기 유지 체계를 ‘오토포이에시스(자기생산)’라 정의하였다.

[4] Varela FJ, Thompson E, Rosch E. The Embodied Mind: Cognitive Science and Human Experience. MIT Press, 1991.

[5] 40억 년 생명사의 시간성이 현재 개체의 몸 안에서 선천적 조건과 발달적 가능성으로 어떻게 조직되는가 하는 질문은 고전의학에서 원기(元氣)와 신(腎)의 고유한 탐구 영역에 속한다. 이 거대한 시간의 문제는 훗날 腎(신)으로 가는 길목에서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