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谷의 따뜻한 생명 읽기

肝 간으로 가는 길 · 제15편

第2程. 첫걸음에는 발이 없었다

생명은 언제 처음 방향을 얻었는가

溫谷 · · 13분

박물관의 유리 회전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거대한 뼈의 능선이 시야 한복판을 가로막았다.

서울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의 1층 중앙홀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대도시의 국립 박물관들처럼 광활한 개방감으로 압도하기보다, 높은 천장 아래 세 개 층이 포개진 구조였다. 그러나 중앙홀 바닥에 발을 딛자, 공간의 밀도가 달랐다.

홀 한가운데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서 있는 아크로칸토사우루스(Acrocanthosaurus)의 골격 화석이 머리 위 허공을 찌르고 있었다.

고개를 한껏 젖혔다. 육중한 두개골과 톱니 같은 이빨이 박힌 턱, 등줄기를 따라 돛처럼 솟은 척추의 신경배돌기, 거대한 골반을 디딤판 삼아 바닥을 박차는 굵은 뒷다리뼈가 허공에 팽팽한 호를 그리고 있었다. 그 뒤로는 길게 뻗은 꼬리뼈가 무게의 균형을 잡듯 완만한 곡선으로 허공을 갈랐다.

살점도, 피도, 숨도 다 빠져나간 채 수억 년의 시간 속에서 석회질로 굳어버린 광물의 뼈대였다. 그런데도 멈추어 있는 뼈대 앞에서 이상할 만큼 뚜렷한 운동의 기세가 느껴졌다. 머리는 전방의 무언가를 겨누고 있었고, 골반과 다리뼈는 지면의 반작용을 받아낼 듯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으며, 꼬리는 몸통이 쏠릴 반대편 허공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초의 움직임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방문한 박물관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거대한 달리기의 잔해였다.

지난 여정, 야구장의 9회 말 만루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투수가 투구판 위에서 동작을 멈추었을 때, 실제 공간에서 위치를 바꾼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의 몸과 관중의 시선은 이미 다음 순간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생명은 언제부터 세계를 향해 먼저 기울어지기 시작했을까. 이 정교한 골격의 전진은 진화의 어느 지점에서 첫 번째 방향을 얻어낸 것일까.


안내판이 가리키는 동선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박물관의 관람 순서는 독특했다. 1층 중앙홀에서 공룡을 본 뒤 가장 높은 3층 ‘지구환경관’으로 먼저 올라가고, 2층 ‘생명진화관’을 거쳐 1층 ‘인간과 자연관’으로 내려오도록 짜여 있었다.

발바닥에 인조대리석 계단의 단단한 감촉이 전해졌다. 한 층씩 올라갈 때마다 아래층에 남겨둔 공룡의 등뼈가 시야 아래로 멀어졌다.

시간은 대개 아래에서 위로, 과거에서 현재로 쌓이는 것이라 여겨왔다. 이곳에서는 반대였다.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갈수록 시간의 가장 깊고 오래된 바닥을 향해 거슬러 오르게 된다.

계단실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관람객들의 발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벽 너머 전시실에서는 우주의 탄생을 알리는 영상의 둔탁한 저음이 발목을 타고 미세하게 전해졌다. 나는 앞으로 걸어가면서 시간을 거꾸로 오르고 있었다.

3층 지구환경관의 문턱을 넘어서자, 어두운 실내에 빛과 소리가 소용돌이쳤다. 빅뱅과 함께 팽창하는 우주의 영상, 회전하는 가스 구름 속에서 뭉쳐지는 태양계의 행성들, 지표면을 뚫고 솟구치는 마그마, 지진으로 어긋나는 단층 모형이 이어졌다.

전시실 안의 세계는 멈추어 있지 않았다. 별은 폭발했고, 행성은 궤도를 돌았으며, 대륙의 판은 서로를 밀어붙여 산맥을 융기시켰다. 생명이 태어나기 전부터 세계는 거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역동적인 장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용암은 경사를 따라 흘러내렸지만, 중력이라는 외력에 이끌려 내려간 것일 뿐 스스로 낮은 골짜기를 ‘향해’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행성은 궤도를 따라 공전했지만, 질량이 만든 시공간의 곡률을 따를 뿐 자기 유지를 위해 다음 위치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물리적 운동은 생명보다 아득히 먼저 존재했다. 다만 그 운동에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방향‘이 없었다. 그렇다면 세계의 물리적 흐름 속에서 생명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움직임에는 무엇이 새로웠던 것일까.

3층 전시실을 빠져나와 2층 생명진화관으로 내려가는 경사로에 접어들었다. ‘생명의 기원과 탄생’이라는 표제판이 눈에 들어왔다. 걸음이 느려졌다. 행성의 물리적 회전이 끝나는 자리에서 생명이 스스로 방향을 틀어 움직이기 시작한 최초의 장면이 나타나리라는 기대가 일었다.

막상 생명진화관 초입에 들어섰을 때 마주한 것은 둥글넓적한 바위 덩어리 하나였다. 조명을 받으며 유리 진열장 안에 놓여 있는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 화석이었다.

유리벽 가까이 다가가 표면에 이마가 닿을 듯 허리를 숙였다. 바위 단면에는 가느다란 줄무늬들이 나이테처럼 층층이 겹쳐 굳어 있었다. 광합성을 하던 고대 미생물 군집이 퇴적물을 붙잡고 광물을 침전시키며 오랜 세월 쌓아 올린 흔적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돌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물결치듯 굳은 무늬는 분명 오래전 생명 활동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 돌 어디에서도 생명체가 어느 쪽으로 발을 내디뎠는지, 어느 방향으로 몸을 밀어 넣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살아 있었다는 흔적은 남았으나,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스트로마톨라이트 진열장을 지나 에디아카라(Ediacaran) 생물군 구역에 닿았다. 캄브리아기 폭발 이전, 바다 밑바닥을 채웠던 다세포 생물들의 화석이 얕은 부조처럼 벽면에 걸려 있었다.

동물의 형태라기보다 바다 밑바닥에 펼쳐진 나뭇잎이나 깃털, 누비이불의 주름처럼 보였다. 둥근 원판 모양의 윤곽, 중심축에서 좌우로 갈라져 나간 잔주름들이 돌 표면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어느 쪽이 앞이고 뒤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디가 먹이를 받아들이는 입이고 어디가 세계를 탐색하는 머리인지, 납작한 화석의 윤곽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안내판의 작은 글씨를 거듭 읽으며 진열장 주변을 돌았다. 일부 표본에서 바닥의 미생물 매트 위를 기어가며 흔적을 남겼을 가능성이 언급되어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퇴적물 속에 납작하게 눌려 굳은 형태뿐이었다. 몸의 윤곽은 나타났으되, 그 몸이 향했던 세계는 돌 속에서 쉽게 읽히지 않았다.

진열장 앞에 멈춰 서서, 내 운동화 앞코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전시가 압축되어 있어 박물관이 움직임의 기원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가만히 서서 생각을 굴리는 사이, 질문의 방식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전시관을 걸어 다니며 은연중에 ‘최초의 발자국’이나 ‘헤엄치는 지느러미의 뼈’ 같은 단단한 물건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최초의 움직임이 일어났을 원시의 바다에는 뼈도, 단단한 껍데기도, 관절을 꺾는 다리도 없었다.

화석은 형태를 보존하고, 광물화된 껍질을 남기며, 물질의 굳기를 기록한다. 반면 운동은 시간 속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사건이다. 어느 미세한 원시 생명이 몸의 한쪽 막을 늘려 환경 속으로 내밀고, 내부의 원형질을 그쪽으로 밀어 넣었다가 다시 둥글게 형태를 거두어들였던 찰나의 흔들림은 어떤 모래와 진흙 속에도 화석으로 찍혀 남을 수 없었다.

그때의 생명에게 아직 발이 없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나는 최초의 발자국을 찾고 있었다. 전시장은 보존된 몸들을 남겨놓았지만, 움직임은 그 몸과 몸 사이를 흘러간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 있었다.


화석이 비워둔 자리를 더듬어 보기 위해, 오늘날 살아 있는 세포의 미세한 움직임을 떠올려본다.

현미경 아래에서 관찰되는 단세포 진핵생물이나 우리 몸속을 유영하는 면역세포에게는 관절도, 뼈도, 발도 없다. 그래도 그들은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이동한다.

세포는 주변 환경의 화학적 농도 차이나 물리적 자극을 표면의 수용체로 감지한다. 어느 한쪽에서 유익한 신호가 포착되는 순간, 대칭적이던 세포 내부는 비대칭으로 재편된다. 이동 방향이 정해지면 세포 안에 일시적인 ‘앞(front)’과 ‘뒤(rear)’가 생겨난다.

앞쪽에서는 액틴(actin) 단백질들이 사슬처럼 결합하며 막을 바깥으로 밀어내어 위족(pseudopod)이라는 납작한 돌출부를 뻗는다. 세포의 앞머리가 새로운 지면을 향해 확장되는 동안, 뒤쪽에서는 액틴과 미오신(myosin) 모터 단백질이 상호작용하며 세포막을 조여 꼬리 부분을 앞으로 끌어당긴다. 앞에서 내밀고 뒤에서 거두어들인다.

세포는 공간에서 실제로 위치를 옮기기 전에 자기 몸 안에 앞과 뒤라는 내적인 차이를 먼저 만든다.

생명의 움직임은 발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세포가 환경의 차이를 분별하고, 대칭적인 몸을 깨뜨려 한쪽을 앞머리로 삼고 다른 쪽을 뒤로 정렬하는 순간 운동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第1程의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 온몸의 근육과 시선을 포수의 미트를 향해 비대칭으로 정렬시켰던 것처럼, 생명의 움직임은 실제 변위(變位)에 앞서 방향을 정하고 몸을 정렬하는 일을 필요로 했다.

유리벽을 따라 다음 전시장으로 걸음을 옮기자 진화의 풍경이 달라졌다. 캄브리아기 폭발의 시대를 알리는 청장 생물군(Chengjiang biota)과 버제스 셰일(Burgess Shale) 생물군의 전시 구역이었다.

생소하고 기묘한 이름들이 전시판을 채우고 있었다. 머리 위에 다섯 개의 눈과 긴 주둥이를 단 오파비니아, 둥근 입과 날카로운 집게발을 가진 아노말로카리스, 가시 같은 다리로 바닥을 디디고 있는 할루키게니아.

이름과 형태는 낯설었지만, 그 몸들이 보여주는 공통된 특징은 선명했다. 몸 앞쪽에 눈과 더듬이 같은 감각기관이 솟아 있었고, 입은 감각기관 바로 뒤에 자리 잡았으며, 몸통 양옆으로는 물을 가르거나 바닥을 밀어내는 부속지들이 돋아나 있었다.

세포 수준에서의 앞과 뒤가 신호에 따라 잠시 생겨났다 사라지는 일시적인 극성이었다면, 캄브리아기 동물들에게 앞과 뒤는 단단한 기관의 배열로 굳어진 신체의 기본 설계였다. 감각기관의 발달은 몸에 직접 닿기 전 저 멀리 떨어진 공간의 차이를 미리 감지하고, 다가갈 것인가 달아날 것인가를 미리 준비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했다.

추적과 회피, 포식과 도주.

생명의 방향은 이제 자기 몸의 둘레를 벗어나 아직 닿지 않은 먼 공간의 지형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낯선 생물들의 행렬을 지나치자, 어릴 적 과학책에서 수없이 보았던 화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삼엽충(Trilobite)이었다.

단단한 방패 모양의 머리(頭部), 마디마디 규칙적으로 겹쳐진 가슴(胸部), 둥글게 마무리된 꼬리(尾部). 좌우대칭의 외골격 위에 수많은 렌즈가 벌집처럼 박힌 겹눈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삼엽충의 화석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조금 전 세포 안에서 일어났던 미세한 액틴의 떨림을 다시 겹쳐보았다. 한때 단세포 안에서 단백질들의 비대칭적 쏠림으로 잠시 나타났다 스러지던 그 불안정한 ‘앞과 뒤’가, 수억 년의 세월을 거치며 마침내 머리와 꼬리라는 분절된 골격 구조로 정착해 있었다. 머리는 새로운 감각 신호가 밀려오는 전방을 향해 열려 있었고, 몸통의 마디마디는 지면의 굴곡을 따라 힘을 전달하며 전진의 축을 유지했다.

방향은 이제 순간의 사건을 넘어, 몸의 형태가 되어 있었다.


발걸음은 고생대 어류를 지나 중생대 육상척추동물 코너로 이어졌다. 물속에서 지느러미로 물을 밀어내며 유선형의 궤적을 그리던 생명들이, 점차 지느러미 속에 단단한 뼈마디를 채워 넣고 뭍으로 기어오르는 과정이 전시되어 있었다.

부력이 지탱해주던 수중 세계를 떠나 공기 속으로 들어서는 일은 호흡 방식만 바꾸어서는 불가능했다. 생명은 온몸을 짓누르는 중력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사지는 몸통을 지면에서 들어 올려야 했고, 척추와 골반은 다리가 지면을 밀어낸 반작용의 힘을 머리끝까지 전달할 수 있도록 견고한 아치 구조로 다시 짜여야 했다. 수중 음파를 감지하던 감각의 기준선은 공기의 파동과 빛의 경로를 읽어내는 육상형 감각기관으로 재편되었다.

뭍으로 올라온 것은 허파만이 아니었다. 중력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온몸의 힘의 축이 새로 배열되었다. 운동 양식이 바뀔 때마다 감각과 신경, 근육과 뼈, 호흡과 순환계는 새로운 방향성을 떠받치기 위해 자기 자리를 다시 잡았다.

전시실 후반부에 이르자 조명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유리장 안에 두개골 화석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는 인류 계통의 두개골들이었다. 이마의 경사가 점차 가팔라지고, 돌출되었던 턱이 안쪽으로 들어가며, 뇌를 감싸는 두개강의 부피가 둥글고 크게 팽창해 가는 윤곽이 한눈에 보였다.

멈추어 있는 두개골들을 바라보며 그 뼈 안에서는 직접 볼 수 없는 인간 특유의 움직임들을 떠올렸다.

두 발로 서서 체중의 중심을 미세하게 이동시키며 균형을 잡는 보행, 엄지와 다른 손가락들을 맞부딪히며 돌을 깨뜨려 도구를 벼려내는 손길, 움직이는 짐승의 다음 도주 경로를 허공에 미리 그리며 온몸의 힘을 손끝에 실어 창을 던지는 투척, 혀와 입술과 후두의 미세한 근육들을 밀리초 단위로 조율하여 소리를 만드는 발화(發話).

방향의 지평이 다시 한번 넓어지고 있었다.

단세포 생물의 방향은 세포막 바로 주변의 화학적 농도 차이에 붙어 있었고,
캄브리아기 동물들의 방향은 눈앞에 나타난 먹이나 포식자의 공간적 거리에 묶여 있었다. 반면 인간의 움직임은 현재 감각기관에 닿지 않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향해 몸을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손에 쥔 돌을 깨뜨릴 때, 인간의 손 근육은 지금 눈앞에 있는 둥근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질 날카로운 칼날의 형상’을 미리 겨누고 있었다.

第1程의 투수가 포수의 사인을 읽고, 주자의 움직임을 견제하며, 아직 손가락을 떠나지 않은 공이 포수의 미트에 꽂히는 궤적을 상상 속에서 완성한 뒤에야 비로소 발을 디뎠던 것처럼.

인간의 운동은 눈앞의 자극에 반응하는 반사를 넘어, 상상된 미래의 결과를 향해 온몸의 긴장을 미리 엮어내는 시간적 확장이었다.

생명진화관의 완만한 출구를 빠져나와 마지막 전시실인 1층 ‘인간과 자연관’으로 내려왔다.

전시실 벽면을 채운 패널들 앞에서 발이 멈추었다. 기후 위기로 녹아내리는 빙하의 사진, 열대우림의 파괴, 멸종되어 가는 생물종의 그래프, 플라스틱 쓰레기로 뒤덮인 해양 생태계의 모형이 형광등 불빛 아래 펼쳐져 있었다. 진화의 여정을 따라오며 들떠 있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인간은 수십 년 뒤의 기후 변화를 컴퓨터 모델로 정교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다. 숲이 사라지면 어떤 재앙이 닥칠지, 화석연료를 태우면 지구의 온도가 어떻게 변할지 숫자로 계산하고 그래프로 그려내며 미래를 내다본다. 그러면서도 실제 행동과 집단적 발걸음은 파국을 향한 관성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멀리 보는 능력은 생명에 유리한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는 힘과 별개였다. 방향을 감지하고 예측하는 능력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그 앎이 실제 몸의 나아감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지향성은 맹목이 될 수 있었다.

생명의 방향은 자신이 내딛은 발걸음이 세계에 미친 영향을 되돌아보고, 그 피드백 속에서 매 순간 궤적을 고쳐 잡아야만 유지된다. 머릿속에서 홀로 완결되는 화살표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관을 빠져나오자 처음 출발했던 1층 중앙홀의 환한 공간이 다시 나타났다. 천장 높이 솟은 아크로칸토사우루스의 골격이 시야를 채웠다.

박물관 문을 처음 열고 들어섰을 때 눈에 보였던 것은 위압적인 크기와 거대한 턱, 날카로운 발톱의 형상이었다. 우주의 폭발에서 시작해 단세포의 바다를 건너, 뼈와 감각이 빚어낸 긴 시간을 돌아 나온 지금, 저 거대한 공룡의 다리뼈와 등뼈 속에서 다른 움직임이 겹쳐 보였다.

먼 옛날 단세포 생물이 세계의 차이를 감지하고 자기 몸 안에 앞과 뒤를 만들던 미세한 비대칭의 움직임. 세포 안에서 막을 밀어내던 액틴의 분자 운동이 수억 년의 시간을 건너 골격근의 수축 섬유로 조직되고, 빛의 명암만을 겨우 감지하던 원시의 감각점이 포식과 도주의 궤적을 그리는 눈으로 벼려졌으며, 그 감각과 운동이 맞물려 저 거대한 달리기라는 생명 형태로 굳어져 있었다.

박물관에 들어설 때 나는 공룡의 거대한 뼈를 보았다. 같은 자리로 돌아왔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돌에도 남지 못했을 어느 세포의 작고 희미한 앞과 뒤였다.

박물관 유리문을 밀고 바깥으로 나왔다.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햇살 아래로 박물관 앞마당의 경사진 계단과 멀리 뻗은 도로,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눈에 들어왔다.

주차장으로 가는 계단의 첫 번째 턱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오른발이 콘크리트 바닥에서 떨어져 허공으로 들리기 전, 내 골반과 척추와 시선은 이미 다음 계단의 디딤판을 향해 미세하게 기울어지며 체중의 중심을 옮겨놓고 있었다. 세계의 차이를 감지한 몸이 자기 안에 앞과 뒤를 만들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쪽을 향해 스스로를 기울이는 순간부터 움직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와 박물관 건물을 뒤돌아 바라보았다. 인간과 자연관에서 마주한 풍경과 함께 또 하나의 물음이 남았다.

우리는 이제 너무도 멀리 감지하고, 너무도 먼 미래를 상상한다. 눈앞에는 수많은 감각 신호가 쏟아지고, 몸 안에는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의 가능성들이 어지럽게 펼쳐진다. 향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그 수많은 감각의 파편과 미세한 긴장은 어떤 원리로 길을 잃지 않고 하나의 온전한 ‘나아감’으로 묶이는 것일까.

가로등이 꺼진 밤길로 접어들었다. 다음 디딤판은 보이지 않았지만, 발은 이미 어딘가를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